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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38

잠자리가 나는 시간 2호저하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 우뚝 멈춰 물었다."무슨 소리지?"매미였다."매미가 우는 거야.""매미가 왜 울어?""앗! 할아버지 실수! 우는 게 아니고 말하는 거야. 매미는 저렇게 말해.""매미는 왜 저렇게 말해?""매미 목소리가 저래. 강아지가 멍멍, 고양이는 야옹하는 것처럼"조금 더 가다가 저하가 다시 말했다."모기다!"공중에 날아다니는 잠자리를 보고 한 말이었다."모기가 아니고 잠자리야.""잠자리는 왜 말 안 해?""말하지. 아주 작은 소리로 말해서 우리 귀에 안 들려."하얀 토끼풀꽃과 개망초, 작은 개미, 참새, 까치, 고여있는 빗물, (저하가 바다라고 부르는) 호수, 내리막길과 오르막길, 공원을 관리하는 아저씨들, 그들이 타고 온 전기차 ······ 지구를 침공한 외계인에게 자꾸 '왜요?'라고.. 2024. 7. 7.
찬밥이건 더운밥이건 2 오후 일과는 손자저하1호의 하굣길에 마중가는 것이다.교문에서 기다리는데 며칠 전에 같이 놀아 얼굴이 익은 한 아이가 다가와 인사를 하며 "제가 놀이터에서 기다린다고 (저하에게) 전해주세요."라고 말을 하곤 저만치로 달려간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다. 그럴 바에야 같이 나오면 될 일인데 · · · · · · 잠시 후 휴대폰 삼매경에 빠진 저하기 나타난다.제 부모도 아내와 나도 걸어다니며 휴대폰 하지 말라고 매번 주의를 주지만 여전하다.말 안듣기. 세상 모든 자식들의 공통점이다.휴대폰을 보다가 나를 지나친 후에야 어리둥절해서 나를 찾느라 주위를 두리번거린다.어깨를 툭 치자 깜짝 놀라더니 웃으며 적반하장의 반격을 한다."왜 숨어 있었어요?"그리곤 친구의 말을 전하자 '빨리 오세요' 하며 바로 뒤로 돌아 뛰.. 2024. 6. 6.
찬밥이건 더운밥이건 손자저하 1호의 하굣길에 마중 나갔다.저하는 현관문을 걸어 나오면서 손 한 번 슬쩍 들어 올리는 것으로 나를 알아봤다는 표시를 했다. 작년까지만 해도 달려 나오며 반가움을 표시했는데 이제는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더 열심이다.가까이 다가와서는 다분히 나도 들으라는 의도로 친구에게 말했다."야, 너두 뭐 먹으러 같이 가자. 우리 할아버지가 사줄 거야." 학교 앞 무인점포점에서 저하와 친구는 아이스크림과 축구 카드를 고르고 나는 뒤처리(계산)를 했다.간식을 먹은 저하 일행은 놀이터로 갔다. 그리고 금지된 곳과 위험한 곳만을 골라 오르내렸다. 며칠 전에 누군가가 떨어져 다리를 다쳤다고 한 어른이 주의를 주고 지나갔다. "다리 다치면 축구를 못할 수도 있어."나의 저하가 좋아하는 축구를 예로 들어 공포심을 조.. 2024. 5. 30.
여기도 꾸짖어 주시라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약속을 할 때 빼먹지 않고 한 가지 단서를 붙인다. '만약 손자저하를 보러 가야 할 사정이 생기면 이 약속은 급작스레 취소될 수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저하를 보러 가야 할 사정'은 대략 딸아이나 사위가 회사일이 바쁘거나 출장이 잡힐 때, 아니면 저하들이 갑자기 아플 때이다. 어른들의 회사일이야 대부분 예정되어 있어 돌발적인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저하들이 아픈 것은 대개 느닷없이 찾아온다. 게다가 두 저하들은 누구 하나가 아프면 릴레이를 하듯 돌아가며 아프곤 한다. 작년 가을에도 그러더니 이번 연말연시에도 2호가 먼저 열이 나고 가라앉는가 싶더니 뒤이어 1호가 독감을 심하게 앓고 있는 중이다. 워낙 에너지가 넘치는 저하인지라 웬만한 고열에는 끄떡없이 활기차게.. 2024. 1. 5.
'친구'와 '저하' 사이 코로나라는 이름도 생소한 바이러스가 어느 날 갑자기 엄습했다.당황과 공포로 세상은 휘청였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괴물체와 싸워야 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걸핏하면 문을 닫았다. 근처 학교에서 감염이 확인되어도 유치원은 지레 놀라 아이들의 등원을 금지했고 학부모들도 그런 결정에 큰 불만이 없었다.그 결과 손자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보통 때 같으면 아파트 놀이터에서 미끄럼틀과 그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제법 멀리 있는 파출소와 소방서까지 쏘다니며 보냈겠지만 주로 집에서 머물러야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는 이웃들과도 서로 침묵 속에 야릇한 긴장감을 느끼던 때였다. 하루종일 집에서 보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뽀로로와 타요버스, 로보카 폴리에게만 어린 손자를 돌봐달라고 맡길 수는.. 2023. 9. 21.
친구들이 있다 친구들은 매일 놀고 먹고 잔다. 웃고 울며, 떼를 쓰고 고집을 피우며 하루하루가 다르게 자란다. 떨어져 있는 시간에도 아내와 나는 늘 그런 모습과 목소리를 눈과 귀에 달고 산다. 1호가 내 핸드폰에 메모를 남겼다. "나는 원래 요리사가 될 꺼였다. 하지만 나는 과학이 더 재미있어서 과학자가 될 꺼였는데 내가 수요 축구에서 열 골을 넣고, 토요 축구에서 다섯 골을 넣어서 축구 선수로 바꿨다. 또 다른 이유는 내 모든 슛팅이 강해서에요." 지난 6월 아내와 나는 1호 친구와 태국을 여행했다. 여행 중 1호는 한국의 부모에게 카톡을 보냈다. "엄마 아빠, 오늘 스노클링 했어요. 잘 지내고 있어요? 잘 지내시면 금요일 오후에 만나요. 잘 지내시지 않으면 남은 시간 동안 잘 지내세요." "엄마 아빠, 할아버지가 .. 2023. 9. 2.
잠아 오지마라 둘째 손자저하에게 물었다. "어린이집에선 밥(점심) 먹고 나서 뭐 하지?" "잠 자." "그러면 집에선 밥 먹고 나서 뭐 해야지?" "놀아."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뭔가 나른한 신호가 오는지 부산하던 움직임이 둔해지면서 텔레비전을 보겠다고 한다. 요즘 저하가 좋아하는 프로그램은 다. 그리고 잠과 맞서기 시작한다. 기세 싸움은 늘 팽팽하다. 잠자리에 들기를 거부하며 저하는 버티고 또 버틴다. 가끔은 먹으면서 조는(혹은 졸면서 먹는) 신공을 보여주기도 한다. 둘째 저하의 모습은 첫째의 기억을 소환한다. 몇 해 전 첫째도 둘째와 비슷한 나이에 동일한 모습을 보여준 바 있다. 텔레비전을 보면서 졸고, 졸면서도 자러 가는 건 거부했다. 졸면서도 어서 밥을 먹고 키즈클럽에 가겠다는 투지를 보여주었다. 이미 여행 중.. 2023. 5. 30.
화상첨화(花上添花) 어젯밤 함께 잠자리에 누워 첫째 손자친구와 BTS의 노래를 들었다. 친구가 먼저 잠이 들어 휴대폰의 유튜브를 닫자 어디선가 토닥거리는 작은 소리가 들렸다. 무슨 소리일까? 컴퓨터라도 끄지 않은 것일까? 방 안을 둘러보다 빗소리라는 걸 알게 되었다. 빗소리가 아파트 방안까지 파고드는 걸 보니 제법 세차게 내리는 것 같았다. 커튼을 거두자 어두운 유리창에 맺혀 있는 빗방울이 보였다. 극심한 봄가뭄이라던데 기왕 내릴 거면 넉넉히 내렸으면 싶었다. 아침이면 아파트 정원과 산책길이 떨어진 꽃잎으로 가득해지겠지만 조지훈 시인의 말대로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할 수야 있으랴. 지는 꽃은 져도 피는 꽃은 연이어 피어날 것이다. 진달래, 철쭉, 복사꽃, 살구꽃, 제비꽃, 민들레꽃, 씀바귀꽃, 엉겅퀴꽃, 얼레지꽃 외.. 2023. 4. 5.
친구들은 자란다 몇 해 전 도통 잠을 안 자려고 하는 손자친구에게 엄마가 말했다. "늦게 자면 할아버지 할머니도 내일 늦게 와." 손자친구는 고개를 저었다. "할아버지 할머니는 날 좋아해서 어차피 일찍 올 걸∼! " 그러던 친구가 코로나의 북새통을 지나 어느덧 유치원을 졸업했다. 축구와 스케이트와 스키에 이어 요즈음은 태권도의 스텝과 품세를 뽐내기도 한다. 귀가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갑자기 옷자락을 제치고 기마자세를 취했다. 비로소 드러난 위풍당당 초록띠! 그리고 초등학생이 되었다. 방문을 굳게 닫고 입산수도의 도인처럼 비장하게 공부에 매진하는 폼을 잡기도 한다. 방문엔 '11X 7=, 33X7 =, 63x3=, 99x7=' 같은 '어려운 공부'하니 출입을 금지해 달라는 공고문이 붙어 있다. 글씨 좀 잘 쓰면 좋겠지만, .. 2023.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