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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친구'와 '저하' 사이

by 장돌뱅이. 2023. 9. 21.

코로나라는 이름도 생소한 바이러스가 어느 날 갑자기 엄습했다.
당황과 공포로 세상은 휘청였다.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미지의 괴물체와 싸워야 했다. 어린이집과 유치원은 걸핏하면 문을 닫았다. 근처 학교에서 감염이 확인되어도 유치원은 지레 놀라 아이들의 등원을 금지했고 학부모들도 그런 결정에 큰 불만이 없었다.

그 결과 손자와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보통 때 같으면 아파트 놀이터에서 미끄럼틀과 그네를 타거나 자전거를 타고 제법 멀리 있는 파출소와 소방서까지 쏘다니며 보냈겠지만 주로 집에서 머물러야 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마주치는 이웃들과도 서로 침묵 속에 야릇한 긴장감을 느끼던 때였다. 

하루종일 집에서 보내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었다. 뽀로로와 타요버스, 로보카 폴리에게만 어린 손자를 돌봐달라고 맡길 수는 없었다. 매일 새로운 놀이를 하기 위해 책도 보고 인터넷으로 조사도 했다. 어떤 놀이는 노력과 확신에 비해 손자의 반응이 시원찮았던 반면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어떤 놀이는 예상 밖의 호응을 얻기도 했다. 


(* 이전 글 :
 2020.03.18  - 손자친구와 음식 만들기)

손자친구와 음식 만들기

어린이집이 문을 닫아 손자친구가 24시간 집에서 생활해야 하는 '잠시 멈춤'의 시기이다. 문제는 활동적인 친구의 '활동'은 멈출 수 없다는 점이다. 어린이집, 키즈카페, 친구집 방문과 초대, 놀

jangdolbange.tistory.com

일상을 놀이로 바꾸어보자는 생각에서 함께 음식 만들기를 해보았다.
칼과 불을 써야 하니 어린 손자와 지속하기에는 한계가 있는 놀이였다.  

다른 뭔가 있지 않을까 궁리 끝에 영상 마술 강좌를 신청했다. 손자는 신기해했다. 나에게 배운 것을 다른 식구들 앞에서 자랑을 하며 즐거워했다. 지금은 손자 이전에  나의 놀이가 되었다. 마술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과 함께 동아리를 만들어 정기모임을 갖게 된 것이다. 몇 차례 짧은 공연도 했다.  

그림도 좋을 것 같아 색연필로 그리는 영상 강좌를 들었다.
하지만 어린 손자에게 체계적으로 그림을 가르칠 실력은 안 되어 제대로 실행에 옮기지는 못했다. 

그렇게 시작한 그림 역시 지금은 나의 놀이가 되었다.

강의를 수강한 사람들이 모여서 색연필화 대신에 어반스케치를 공부하게 된 것이다.
초보인 나는 앞서가는 회원들의 도움과 유튜브 등을 보며 따라하는 중이다.
그림을 그리는 동안은 잡념이 사라지고 선을 긋고 색을 칠하는 일에만 집중을 하게 된다.

보드게임은 손자와 자주 하는 놀이다. 처음에는 우노(UNO)나 고피쉬(GO FISH)처럼 간단한 놀이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초등학생이 된 손자는 복잡한 규칙의 게임도 곧잘 한다. 지난여름방학에는 보드게임을 많이 하고 싶다고 계획에 넣기도 했다. 보드게임의 종류는 매우 많다.
좀 더 체계적으로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지금은 '보드게임 지도자 과정'을 수강 중이다. 

은퇴 이후 손자들은 내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들어왔다.
손자들은 내게 '친구'가 되고, '저하'가 된다. 어떻게 부르건  항상 꼬옥 안아주고 싶다. (나는 이것을 '쌔서미'라고 부른다. 두 팔과 가슴에 고소한 참기름이 묻어날 것 같기 때문이다. 손자도 그 의미를 알고 있다.) 놀려주고 싶고 놀아주고 싶다.

손자들을 위해 알아보고 준비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이젠 내 생활의 일부가 되었고 새로운 시간을 열어주었다. 나는 그들의 웃음과 즐거움을 그냥 따라간 것뿐이다.

오늘 또 손자들을 보러 간다. 아마 딸아이는 내가 올 거라는 사실을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어린이집에서 둘째는 나를 보자마자 가방도 챙기지 않고 뛰쳐나올 것이고, 수영교실에서 돌아오는 첫째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버스에서 내릴 것이다. 그리고 물음인지 탄성인지
기대만빵의 목청을 높일 것이다.
"오늘 자고 가겠네요!"

그것이 무슨 인생인가, 근심으로 가득 차
잠시 멈춰 서 바라볼 시간조차 없다면.

나뭇가지 아래서 양과 소의 순수한 눈길로
펼쳐진 풍경을 차분히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숲을 지나면서 수풀 속에 도토리를 숨기는
작은 다람쥐들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대낮에도 마치 밤하늘처럼 반짝이는 별들을
가득 품은 시냇물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아름다운 여인의 다정한 눈길에 고개를 돌려,
춤추는 그 고운 발을 바라볼 시간이 없다면.

눈가에서 시작된 그녀의 환한 미소가
입가로 번질 때까지 기다릴 시간이 없다면.

얼마나 가여운 인생인가, 근심으로 가득 차
잠시 멈춰서 바라볼 시간조차 없다면.

- 윌리엄 헨리 데이비즈, 「여유」  -

시의 「여유」에는 한가지, 손자 이야기가 빠졌다. 그것은 결코 뺄 수 없는 필수다.
손자와 친구처럼 뒹굴고 '저하'처럼 모시는 시간이 없다면 인생이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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