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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잭 런던의『야성의 부름』

by 장돌뱅이. 2023. 9. 12.

시인 신동엽은 역사를 원수성(原數性), 차수성(次數性), 귀수성(歸數性)이란 그만의 독특한 단어로 구분 지어 보았다. 그는 잔잔한 바다가 원수성의 세계라면, 파도가 일어 공중에 솟구치는 물방울은 차수성의 세계이고,  다시 제자리로 쏟아져 돌아오는 물방울의 운명은 귀수성의 세계라고 설명했다.

다시 말하면 인간이 이룩한 문명의 역사란 싱싱한 생명력 가득한 원수성 세계에서 분열되어,  불안하고 부조리하며 폭력적 광기를 지닌 채 튀어 오른 물방울 같은 차수성이 커져 온 과정이다.  따라서 지금의 세계는 문명 이전의 조화롭던,  '생명체와 대지 사이에 음양적 밀착 관계 이외에 어느 무엇도 그 사이에 끼어들지 않는',  원수성의 고향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돌아가야 하는) 귀수성의 필연과 당위를 지녔다는 것이다.

잭 런던이 1903년에 발표한 소설 『야성의 부름(The Call of The Wild)』은 주인공인 벅을 통하여, '겨울잠으로부터 야성의 혈통이 깨어'나는  '귀수성'의 과정을 보여주는 소설이다.
벅은 몸 무게가 65kg 나가는 커다란 체구에 근육질의 개로 미국 남부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나 인간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그러나 벅의 운명은 골드러시라는 시대적 광풍에 휩쓸려 알래스카로 팔려가며 새로운 전환점을 맞게 된다. 혹독한 자연환경과 '곤봉과 송곳니'가 지배하는 야만의 세계에서 '생명 그 자체처럼 완고하고 지칠 줄 모르는 끈질긴 인내심으로' 견디고, 거친 싸움과 극한의 고통을 피하지 않고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그는 그때까지 인식하지 못했던 내면의 소리를 듣게 되고 잠자던 야성을 깨우치게 된다.

그는 경험에서도 배웠지만 그보다 오랫동안 죽어 있던 본능이 되살아나서 그렇게 빨리 적응할 수 있었다. 길든 세대의 유산들이 그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 베고 자르고 늑대처럼 물어뜯는 식의 싸움을 배우는 것은 조금도 힘들지 않았다. 이런 방식으로 그의 내부에서 잊힌 조상들이 싸웠다. 그들은 벅의 몸속에서 옛 방식을 재빨리 되살려 냈고 그들이 대대로 종족 속에 새겨 놓았던 전략들을 그의 것으로 만들었다. 그런 것들은 아주 쉽게 저절로, 마치 언제나 그의 방식이었다는 듯이 찾아왔다. 추운 밤에 그는 별을 향해 코를 쳐들고 늑대처럼 길게 울었다. 죽어서 먼지가 된 그의 조상들이 하던 행동이었다.

인간과 인간의 요구들은 날마다 그에게서 멀어졌다. 숲 속 깊은 곳에서 벅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신비롭게 떨리고 유혹하는 소리를 자주 들은 벅은 모닥불과 그 주변의 다져진 흙에서 등을 돌려 숲 속으로 뛰어들고 싶었다. 소리가 어디에서 오는지 , 왜 들리는지 그는 알지 못했지만 야성의 부름은 계속되었다. 숲 속 깊은 곳으로부터 들리는 절체절명의 소리였기에 그는 어디로 그리고 왜라는 물음을 던지지도 않았다.

소설 속 인간 손턴은 벅의 생명을 구해주고 '마치 자식을 돌보듯이, 그렇게밖에  달리  길이 없다는 듯이, 벽을 돌봐 주었'지만 그것으로 벅 내면에 숨 쉬는 야성까지 잠재울 수는 없었다.


손턴을 사랑하는 벅의 마음이 아무리 강해도 그것은 부드러운 문명의 산물이었고, 북극이 불러일으킨 원시적 기질은 그대로 살아 벅의 내부에서 꿈틀거렸다. 불과 지붕의 산물인 충성심 그리고 헌신적 사랑과 마찬가지로 야생의 거친 본성과 약삭빠른 책략도 그의 것이었다. 그는 수 세대에 걸쳐 문명의 낙인이 찍힌 남부의 길든 개가 아니라 황야에서 손턴의 불 가로 찾아든 야생의 후예였다. 

문명의 발전은 자연에 대한 지배력 확대의 과정이었다,라는 판단은 인간의 착각일 수 있다. 그것은 다만 무변광대의 바다 가장자리에서 잠시 튀어 오른 물방울일 뿐이다. 자연은 지배하고 통제할 수 있는 대상이 아니다. 자연은 시간과 더불어 스스로 전개될 뿐이다.  인간은 다만 적응할 수 있을 뿐 그 진행의 과정이나 결과에 관여할 수 없다. 지난여름의  기록적인 더위와 폭우는 자연이 스스로 본연의 모습을 회복하려는 거대한  귀수성의 용틀임일지도 모르겠다. 

그는 일어서서 긴장한 채 귀를 기울이고 코로 냄새를 맡았다. 멀리서 날카롭게 짖는 소리가 희미하게 공중으로 퍼져 나갔고 곧이어 비슷하게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일제히 들렸다. 조금 있으니 소리가 더 가까워지고 커졌다. 다시 한번 벅은 그 소리가 기억 속에서 끈질기게 들려왔던 다른 세상의 부름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는 공터 한가운데로 걸어 나가 좀 더 주의 깊게 그 소리를 들었다. 바로 그 부름, 여러 곡조가 합쳐진 부름이었고 어느 때보다 더 유혹적이고 절실하게 울려 퍼졌다. 처음으로 그는 부름에 복종할 준비가 되었다. 

소설 속 벅이 되찾은 야성이 우리가 돌아가야 할 신동엽의 '고향'과  비슷할 것도 같다.

하늘에
흰 구름을 보고서
이 세상에 나온 것들의
고향을 생각했다.

즐겁고저
입술을 나누고
아름다웁고저
화장칠해 보이고,

우리,
돌아가야 할 고향은
딴 데 있었기 때문······

그렇지 않고서
이 세상이 이렇게
수선스럴
까닭이 없다.

-신동엽, 「고향」-


* 잭런던이 미국 자본주의를 비판적으로 다루었던 소설 『강철 군화』의 저자이기도 하다는 걸 이번에 알았다. 금융 과두 정치를 상징하는 '강철 군화'를 올바르게 판단하고 견인하는  잣대는 결국 자연일 것이다.
*『야성의 부름』은 "동네북" 9월 도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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