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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소설 『코리안 티처』

by 장돌뱅이. 2023. 9. 11.

소설 『코리안 티처』는 H대 한국어학당에서 강사를 하고 있는 고학력 여성들의 생존 분투기이다.
작가인 서수진도 한국어를 가르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인지 소설 속 사례들이 현장감 짙게 다가온다.

선이는 7급공무원 시험에 거푸 실패하고 가까스로 얻은 강사자리를 오래  유지하고 싶다.
어학당과 불필요한(?) 마찰을 만들지 않으려 한다. 가르치는 베트남 학생이 받지 못한 월급에 대해선 대신해서 똑 부러지게 나서 주면서도 정작 자신이 받는 부당한 처우에는 침묵한다.

 미주가 가르치는 학생들의 시험 성적 결과는 언제나 으뜸이다. 학생의 올바르지 못한 수업태도와 성적에 대해서 미주는 원칙적인 태도로 처리한다. 하지만 어학당에서는 교육기관 이전에 비즈니스라는 측면을 고려하여 융통성 있는 처리를 요구한다. 비즈니스에서 고객인 학생은 갑이고 어학당은 을이며 책임강사는 병이고 마지막 강사는 정이다. 강사로서 8년의 경력도 미주의 발언에 큰 힘을 실어주지 못한다. 그래도 미주는 강사 자리를 유지하고 싶다. 아직 다 갚지 못한 학자금 대출금이 남아 있고 월세와 각종 공과금을 내야 하기 때문이다.

가은은 학생들 사이에서 인기 만점의 스타 강사다. 강의 평가도 늘 1등이어서 재계약이 거의 확정적으로 보인다. 가은은 동료들과 함께 자신들을 옭아매는 어학당의 구조적인 잘못에 함께 힘을 모으는 대신에 '운 좋은' 현실에 안주하려 한다. 동료 강사들 중 일부는 가은을 시기하여 깎아내려는 사람도 있다. 강사들은 동료이자 학기마다 재계약을 해야 하는 구조 속에서 경쟁자이기도 하다. 

한희는 책임강사다. 일반 비정규 강사들과는 달리 어학당의 신임을 얻은 상태로 한번 더 계약이 연장되면 무기 계약직이 된다. 하지만 결혼에 이은 임신이 그 희망에 큰 장애가 되고 있다. 

"남편이 버는데, 뭐."
"아기를 키우는데 짧게 일하는 게 더 좋잖아?"
이런 말들을 아무렇지 않게 했다. 생활비는 남편이 벌고, 아내는 대학에서 일한다는 그럴듯한 명함을 위해 잠깐 나오는 것, 가사와 양육이 주이고 , 한국어 강사 일은 서브로 하는 것. 그러나 한희는 단 한 번도 이 일을 서브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 일을 해서 월세와 공과금을 냈다. 잘리지 않기 위해 전력을 다했고, 이 일에 뼈를 묻을 생각이었다. (···)
"결혼했는데 왜 그렇게 일을 열심히 해?"
여자가 열심히 일하는 것은 돈을 잘 못 버는 못난 남편을 두었다는 증거라는 듯이. 남편이 돈을 잘 번다면 여자는 일을 할 필요가 없다는 듯이.

책 뒤표지에 다음과 같은 소설의 요약이 있다.

고학력 비정규직 여성들의 일하는 이야기
고학력 비정규직 여성들의 일하는 이야기
고학력 비정규직 여성들의 일하는 이야기

우리의 상황은 어쩌면 그걸 아래와 같이 변용해도 무리는 없어 보인다. 
일에 뼈를 묻으려 해도 묻을 수 없는, '고학력 비정규직 여성들, 젊은 사람들의 일하는 이야기'.

어떻게 바꾸어 표현하든 다음과 같은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다.
'우리들의 일과 사랑은 어째서 이다지도 고단하고 불안하고 억울하며 처절하기까지 한 것일까.'
(서영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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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과 동떨어진 여담이지만 은퇴 후 "한국어 교원 양성 과정"이란 120 시간의 강좌를 수강하며 한국어 공부를 잠깐 한 적인 있다. 이것은 3급, 2급, 1급의 자격증 스펙에서 가장 낮은 등급이다.
수강 후에는 이주노동자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보기도 했다.

날 때부터 당연한 것으로 자연스레  읽고 쓰고 말해온 우리나라 말이 아닌 외국인들을 가르치기 위해 공부한
(결국은 같지만, 조금은 다를 수도 있는) 한국어는 내겐 정말 어려웠다.
무심코 사용했던 단어와 문장 하나하나를 형태소,
음운론, 종결어미, 보조사, 수식언 등등 이름도 생소하고 복잡한 문법적  구조 속에서 이해를 하려면 머리가 심하게 삐걱거렸다.
거기에 띄어쓰기나 사이시옷 규정, 조사 등은 설상가상이었다. 

(*이전 글 참조 :
내겐 너무 어려운 우리말)

내겐 너무 어려운 우리말

은퇴를 하고 무엇을 할까 아내와 의논을 했다. 아내는 "당신이 직장 생활을 해외영업으로 외국인들에게 도움을 받으며 보냈으니 그들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보는 게 어떨까?" 하고 권했다. 나

jangdolbange.tistory.com

관심을 갖다 보니 무심코 쓰는 우리말에 재미있는 부분도 많았다.
예를 들면, '코끼리는 코가 길다'처럼  주어가 둘인 문장이나 '10년 뒤를 생각하라'와 '10년 앞을 내다보자'처럼 앞과 뒤가 (전(前)과 후(後)가 아니라) 미래를 나타내는 같은 표현이 되는 것과 같은.
또 '책', '책밖에', '책'에서 각각의  보조사는 뜻이 비숫하지만 엄밀하게는 쓰임새가 미세하게  다르다는 것도 신기했다.

소설 『코리안 티처』에는 우리 말에 이유를 나타내는 표현이 자그마치 14개나 된다고 했다.
-아/어서,  -(으)니까, -더니,  -(으)므로,  -길래,  -느라고,  -(으)니,  -(으)니만큼,  -기 때문에,  -는 바람에,  -는 통에,  -(으)ㄴ/는 탓에,  -아/어 가지고,  -아/어

그에 비해 결과 표현은  '-(으)ㄴ 결과',  '-(으)ㄴ 끝에',  '-(으)ㄴ 나머지' 정도로 적은 걸보면 정작 결과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던 것 같다. 결과는 하늘에 맡기겠다는 건가. 이미 벌어진 일에는 순응하면서도, 그 일의 이유는 끝까지 파고들어야 직성이 풀리는 언어.

하지만 재미보다는 내 능력으로는 어려움이 커서 결국  나는 2급 도전을 포기하고 이주노동자 가르치는 일도 그만두게 되었다. 그 힘든 공부를 계속하여 다른 나라에서 온 '어린 백성'들에게  '니르고져 할' 바를 가르치는 선생님들에게 존경을 보내며, 젊은 그들에게 우리 사회가 좀 더 나은 대우를 해주기를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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