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울라 모더존-베커( Paula Modersohn-Becker) 「무릎 꿇은 어머니와 아기」1907
음식은 명절의 맛과 냄새와 감촉이며 정서다. 그리고 옛 기억을 불러오는 촉매이다. 추석이 다가와 딸아이네맞이 음식을 만들다 어머니 생각이 났다. 우연히 펼친 오래된 책에서 어머니에 대한 글을 읽은 감정도 더해졌다.
언제였던가요, 어머니. 세찬 비바람과 함께 천둥과 번개가 치던 날 밤 저는 어머니 등에 업혀 있었지요.
그때 아마 저는 열 때문에 끙끙 앓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칭얼거렸던가요? 어머니께서 저를 어르시던 근심스러운 목소리가 기억이 납니다. 번개가 칠 때마다 파란색으로 변하던 방문의 창호지와 순식간에 검은 그림자로 나타났다 사라지곤 하던 문창살이 자꾸 저를 옥죄는 것 같아 저는 점점 더 큰소리로 울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제 기억이 닿는 어머니에 대한 최초의 기억일 겁니다.
어쩌면 어느 해 늦가을 건넛마을의 집안 제사를 따라갔다가 잠이 들어 어머니의 등에 업혀 돌아오던 때가 더 먼저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 어머니 등에서 흔들리다가 문득 두런두런 아버지와 나누시는 말소리에 잠이 깨었음에도 저는 계속 어머니 등에 붙어 있었습니다. 달빛은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가득 채우고도 남아 나뭇잎이 다 떨어진 적막한 숲 속으로 스며들다간 어느새 어머니가 걸어가시는 길 위에도 하얗게 깔려 있었습니다. 기다리고 기다리던 제사 음식은 잠이 들어 끝내 먹지 못했지만 전 따뜻한 어머니 등이 마냥 좋아 그런 아쉬움쯤은 까맣게 잊을 수 있었습니다. 그때 겨드랑이로 손을 넣어 어머니를 꼬옥 안아보았는데 기억나시는지요?
메주를 만들기 위해 콩을 삶는 날을 저는 이상하리만치 좋아했습니다. 콩을 삶는 일은 종종 폴벌레소리가 또렷해져 가는 밤늦게까지 계속되었고 저는 방에서 부엌으로 난 쪽문을 열고 부뚜막에 앉아 계신 어머니를 보며 무언가 시답잖은 이야기를 지금처럼 계속했던 것 같습니다. 분명 어머니 외에도 여러 사람이 있었을 터인데 누구였는지 전혀 기억에 없고 회상 속에는 늘 어머니와 저, 둘만 남아 있습니다. 어머니는 부지런히 움직이시며 일에 열중하시는 와중에도 귀잖은 내색 한번 하지 않으시고 철부지 저의 말에 일일이 응대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자주 빈 그릇을 내밀며 삶은 콩을 한번 더 달라고 졸랐고 어머니는' 메주콩 많이 먹으면 나중에 화장실 같 때 귀신이 나온다' 고 겁을 주시곤 하였습니다. 그러나 말씀과는 달리 손은 먼저 그릇을 받아 들고 잘 익은 콩을 가득히 담아 주셨습니다. 따뜻한 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익은 콩을 퍼내어 절구에 찧고 쟁반 위에서 네모난 메주를 만드시는 어머니의 바쁜 손놀림을 보는 고즈넉한 가을밤이 그냥 까닭 없이 좋았습니다.
어머니에 대한 제 어린 날의 기억은 한 가지만으로도 늘 그렇게 완벽하게 풍성하고 여러 가지를 모아도 함부로 흘러 넘치지 않습니다. 먼 곳 개 짖는 소리처럼 평범한 일로도 특별나고 특별한 일이어도 거슬리지 않습니다. 그것이 나만의 특별한 체험이 아닌 우리 세대 누구에게나 있었던 일이었다고 하더라도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동네 뒷동산에서 해 지도록 개구쟁이로 놀면서도 멀리 황혼의 콩밭머리를 걸어 나오는 사람들 중에 어머니의 모습을 정확히 가려낼 수 있었듯이, 그렇게 어머닌 저만의 어머니 아니셨던가요? 제 딸아이에게도 어머니가 제게 해주셨던 만큼의 아버지이고 싶습니다만 저는 늘 비교할 수 없는 뒤쪽에 있음을 실아가면서 절절히 깨닫습니다.
몇 해 전 여름의 더위가 서서히 물러가기 시작하던 즈음 어머니께서는 마침내 간직하시고 계시던 마지막 숨을 조용히 풀어놓으시며 먼 여행을 떠나셨습니다. 저에게 주실 것을 다 주시고 더 이상 주실 것이 없는 가벼운 모습이 되어 홀연히 떠나신 것입니다. 장례를 치르는 날 아침 어머니의 고향으로 가는 길목에는 날이 밝으면서 짙은 안개가 몰려들었습니다. 어머니의 모든 것을 받고도 미욱하기만 한 이 자식은 그제서야 앞이 보이지 않는 막막함을 깨달았습니다. 굳건하다고 자부해 왔던 나의 홀로서기는 기실 얼마나 허약한 것이었는지요. 앞으로 많은 날을 두고 휘청거릴 것입니다. 하지만 이머니가 그러셨듯 삶을 함부로 규정짓지 않겠습니다. 어머니에게 산다는 일은 그 자체만으로 늘 지고의 것이고 겸허한 것이지 않았습니까? 이제 이 세상의 어떤 걱정도 그냥 세상에 맡겨두시고 다만 편히 쉬십시오. 언젠가 어느 곳에선가 우리가 또 만날 것임을 저는 믿습니다. 고추잠자리가 맴돌던 붉은 무덤 위로 새 잔디가 돋고 달이 그 옛날처럼 동그래지면 다시 찾아뵙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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