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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저하들과 추석 보내기

by 장돌뱅이. 2023. 10. 1.

추석의 유래와 형식은 조상님들께 바치는 제사겠지만 실질은 가족들과, 특히 저하들과 만나는 축제다.
아내와 나는 저하들의 사소한 말과 행동에도 쉽게 감동하고 자지러질 준비가 되어있다.

추석빔을 입은 저하들의 절을 받는 잠깐의 절차가 끝나고 다시 평상복 차림이 되면 저하들은 이내 평소의 권력을 자유롭게 행사하기 시작한다. 

"새로운 마술을 보여줘요."
하는 최초의 하명에 야심 차게 준비한 마술을 보여주었지만 실패했다. 요즘 1호 저하의 마술을 보는 수준이 여간 아니어서 매의 눈으로 서툰 나의 비법을 쉽게 간파하고 말았다. 

'깽깽이' 수준을 겨우 벗어난 1호의 바이올린 연주를 참을성 있게 들어주기도 해야 한다.
가끔씩은 연주하는 노래를 따라 부르라는 지시를 내리기도 한다. 

옛날에 즐거이 지내던 일 나 언제나 그리워라
동산에 올라가 함께 놀던 그 옛날에 친구들
먼 산에 진달래 곱게 피고 뻐꾸기 한나절 울어대는
그리운 옛날에 그 얘기를 다시 들려주세요.

연주에 맞춰 동요「그 옛날에」를 불렀다.
많은 시간이 흐른 뒤에 지금의 이 모든 시간들이 저하에게 노랫말처럼  남게 되기를 바랐다.

형아바라기 2호는 형아보다 훨씬 더 유려한 선율로 바이올린을 연주할 수 있다.
활을 현에 대기만 하면 저절로 연주가 흘러나오는 장난감 바이올린이기 때문이다.

집안 곳곳을 쑤시고 다니기가 시들해지면 밖으로 나가야 한다.
1호는 요리사와 과학자를 거쳐 이제 스케이트 선수를 꿈꾸지만 아직 축구선수의 꿈을 접은 것은 아니다. 물론 수영 선수나 태권도 선수로 변할 수도 있다. 꿈과 변신은 저하들의 특권이다. 나와 사위는 저하들의 강슛을 막아내며 운동장을 달렸다.

보드게임을 빼놓을 수 없다. 블리츠라는 게임에서 '보'자로 시작하는 세 단어를 말해야 했을 때, 1호가 "보장왕!"이라고 외치며 내 패를 가져갔다. 순간 아내와 나는 물론 딸아이와 사위도 어리둥절해졌다. 
"보장왕? 그런 왕이 어딨어? 혹시 보험왕이나 의자왕 아니야?" 
저하는 아니라고 보장왕은 있다고 고구려의 왕이라고 확신에 차있었다.
어른들은 저마다 핸드폰으로 급검색을 했다. 결과는 있었다. 보장왕은 고구려 28대 왕으로 마지막 왕이었다. 저하는 기세등등 상식을 뽐내며 게임의 승리를 가져갔다.

갈비찜
해물잡채
부추전
오징어볶음

앞선 글에서도 말했지만 음식은 명절의 맛과 냄새와 감촉이며 정서다.
아내는 명절 음식으로 갈비찜을 빼놓지 않는다. 저하들의 취향을 고려한 음식이고 어릴 적 추억을 재현한 음식이다. 나는 나머지 음식을 책임진다. 매번 그랬듯 1호와 2호는 모두 갈비찜에 빠져들었다. 갈비찜 국물에 밥을 비벼 갈빗살을 올려서 먹었다. 1호는 뜻밖에 부추전도 좋다고 했다.

긴 명절 연휴다.
오늘은 집에서 디즈니 플러스의 <<무빙>>을 몰아보며 몸을 추스리고 내일은 다시 아내와 내가 '세자궁'으로 건너갈 예정이다.
아직 복종의 시간이 힘든 것보다즐거움이 큰 것은 다행이고 감사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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