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

꽃 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미래, 그리고 지금

by 장돌뱅이. 2023. 9. 25.

♬내 평생 소원이 무엇이더냐. 우리 손주 손목 잡고 금강산 구경일세.
꽃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날을 기다리고 기다리다 이내 청춘 다 갔네······.

대학시절, 양희은이 부른 <늙은 군인의 노래>를 처음  들었다. 막걸리 집에서 이 대목을 부를 때  정말 나도 언젠가  흰머리의 노인이 되어 손주 손을 잡고 걷게 되는 날이 올까?  실감 나지 않는 상상을 가끔씩 해보곤 했다.  물론 흰머리와 손주보다는 막연하게 "꽃 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그날"을 더 많은 방점을 두었지만.

세월이 흘러 나는 어느덧 노래 속 흰머리 노인이 되었다. 긴 시간을 돌아 제자리로 돌아온 듯 세상은 다시 젊은 그 시절의 암울한 모습을 닮아 있지만 상상 속에 추상이던 손주들은 이제 현실 속 실체가 되어 곁에 있다. 주말 동안 손자들과 놀고 웃고 달리다 왔다. 

귀뚜라미에 긴장하는 저하

🎵Music provided by 브금대통령 🎵Track : 나의 영웅, 토요일

유난히도 늦게 잠드는 손자 옆에서 김연수의 단편 소설집『이토록 평범한 미래』를 읽었다. 
이런 글이 있었다.

어릴 때 내가 상상한 미래는 지구 멸망이나 대지진, 변이 바이러스의 유행이나 제3차세계대전 같은 끔찍한 것 아니면 우주여행과 자기부상열차, 인공지능 등의 낙관적인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안다. 우리가 계속 지는 한이 있더라도 선택해야만 하는 건 이토록 평범한 미래라는 것을.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 한  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한다는 것을. 
- 단편「이토록 평범한 미래」중에서-

난 비관주의자야. 이상한 말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세상을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비관주의가 도움이 돼. 비관적이지 않으면 굳이 그걸 이야기로 남길 필요가 없을 테니까. 이야기로 우리가 세상을 바꿀 수 있다면, 인생도 바꿀 수 있지 않겠어? 누가 도와주는 게 아니야. 이걸 다 우리가 할 수 있어. 우리에게는 충분히 그럴 힘이 있어. 그게 나의 믿음이야. 하지만 그럼에도 어쩔 수 없는 순간은 찾아와. 그것도 자주. 모든 믿음이 시들해지는 순간이 있어. 인간에 대한 신뢰도 접어두고 싶고, 아무 것도 나아지지 않을 것 같은 때가. 그럴 때가 어쩔 수 없이 낙관주의자가 되어야 할 순간이지. 아무리 세찬 모래 폭풍이라고 할지라도 지나간다는 것을 믿는, 버스 안의 고개 숙인 인도 사람들처럼. 
-  단편「비얀자그에서 그가 본 것」중에서-

소설에서는 '과거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가 현재를 결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손자들의 '평범한 미래'를 상상하며 일상의 선택을 포기하지 않으면 언젠가 '꽃 피어 만발하고 활짝 개인' '미래가 다가올 확률은 100퍼센트에 수렴'할 것이라는 말이다. 반드시 그런 미래가 아니더라도 우선은 '고개를 숙이고 모래 폭풍을 견디는' 듯한 이 시간을 좀 더 수월하게 보낼 수도 있으리라.

 

*70년대 말 유신 시절 <늙은 군인의 노래>는 방송 금지가 되기 전엔 학교 근처 다방에서도 쉽게 들을 수 있었다. 입대 후 논산 훈련소 오락시간에 그 노래를 불렀더니 조교와 중대장이 가르쳐달라고 할 정도로 일반인들 사이에선 불온한(?) 노래가 아니었다. <늙은 군인의 노래> 외에도 나중에 "상록수"로 알려진 <거치른 들판에 푸르른 솔잎처럼>, <천릿길>, <두리번거린다>등이 들어있는, 김민기대신에  김아영이란 가명이 작사·작곡자로 올라 있는 LP음반도 쉽게 구입할 수 있었다.  <늙은 군인의 노래>가 다양한 형태의 '노가바'로 시위 현장에서 불려진 것은 나중의 일이었다.

 

'일상과 단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저하들과 추석 보내기  (0) 2023.10.01
기억합니다  (0) 2023.09.28
'친구'와 '저하' 사이  (0) 2023.09.21
기도하고 인내하고  (0) 2023.09.18
뽀실뽀실  (0) 2023.09.15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