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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여기도 꾸짖어 주시라

by 장돌뱅이. 2024. 1. 5.

언제부터인가 나는 사람들과 만나는 약속을 할 때 빼먹지 않고 한 가지 단서를 붙인다.
'만약 손자저하를 보러 가야 할 사정이 생기면 이 약속은 급작스레 취소될 수 있습니다. 양해 바랍니다.'
'저하를 보러 가야 할 사정'은 대략 딸아이나 사위가 회사일이 바쁘거나 출장이 잡힐 때, 아니면 저하들이 갑자기 아플 때이다. 어른들의 회사일이야 대부분 예정되어 있어 돌발적인 경우는 흔치 않다.

하지만 저하들이 아픈 것은 대개 느닷없이 찾아온다. 게다가  두 저하들은 누구 하나가 아프면 릴레이를 하듯 돌아가며 아프곤 한다. 작년 가을에도 그러더니 이번 연말연시에도 2호가 먼저 열이 나고 가라앉는가 싶더니 뒤이어 1호가 독감을 심하게 앓고 있는 중이다.

워낙 에너지가 넘치는 저하인지라 웬만한 고열에는 끄떡없이 활기차게 놀지만 어느 임계치를 넘어서면 컨디션이 무겁게 가라앉으며 힘들어하는 모습이 얼굴에 나타난다.
그래도 투정부리지 않고 잘 견디는 나름 의젓한 모습이 더 보는 사람의 애간장을 녹인다.

잠든 저하에게 미지근한 물을 적신 수건을 갈아주며 옆에 앉아 요즘 저하가 좋아하는 책을 읽었다.
『13층 나무 집』은  13층씩 높아지는 제목으로 이어지는 시리즈 물(物)로  '나무 집'에 사는 두 개구쟁이 앤디와 테리가 벌이는 끝없는 장난과 아슬아슬한 모험을 담고 있다.
전래동화처럼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여 '행복하게 잘 살았다'로 끝나는 대신에 두 소년의 엉뚱하고 기발한 상상이 누구에게도 제지받지 않는 자유로움 속에서 마음껏 펼쳐지는 이야기였다.

여기서 나무 집은 '나무로 지은 집'이 아니라 나무 위에 지어진 집을  말한다.
대략 아래 그림처럼 생겼다.

어릴 적 우리도 나무 위에 집을 짓거나 땅을 파서 요새를 만들곤 하지 않았던가.
'13층 나무 집'에는 침실, 욕실, 수영장, 게임방, 볼링장, 덩굴그네를 비롯하여 식인 상어 수조, 레모네이드가 뿜어져 올라오는 분수, 뭐든지 날려 보낼 수 있는 거대한 새총, 따라다니며 입안에 마시멜로를 쏘아주는 마시멜로 발사기, 거대한 바나나를 만드는 기계 같은 기상천외한 것들이 가득하다. 

저하가 낫기만 하면 '13층 나무집'처럼  짜릿하게 재미있는 놀이로 지치도록 어우러질 수 있을 것 같다.
흔히 아프면서 큰다고 하거나 크려고 아픈다고 하지만 그것은 아프지 않을 때의 말이다.
저하가 아플 땐 그런 말이 떠오르지 않고 전혀 위로도 되지 않는다.

아픈 것은, 특히 그냥 열이 나는 증상은 병원에서도 수액 외에 다른 처방이 없다.
한 가지 방법이 더 있을 것 같긴 하다. 평소에 당신이 게을러서 세상이 이 모양이라고 비아냥거리던 바로 '저 위에 계신 그분', 그리고 진지하게 두 손을 모으고 기대고 싶어지는 '그분'의 능력.

예수님께서 회당을 떠나 시몬의 집으로 가셨다. 그때에 시몬의 장모가 심한 열에 시달리고 있어서, 사람들이 그를 위해 예수님께 청하였다. 예수님께서 그 부인에게 가까이 가시어 열을 꾸짖으시니 열이 가셨다. 그러자 부인은 즉시 일어나 그들의 시중을 들었다. 해 질 무렵에 사람들이 갖가지 질병을 앓는 이들을 있는 대로 모두 예수님께 데리고 왔다. 예수님께서는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손을 얹으시어 그들을 고쳐 주셨다.
(루카 4:38 - 40) 

부디 우리 저하의 열도 꾸짖어 주시라.

저하 때문에 마음 졸이고 저하 때문에 웃는다.
2호저하는 가족들이 형에게만, 특히 형이 기침을 할 때  관심을 보이는 것에 샘이 났던가 보다.
'할아버지 나도 기침해요' 하듯이 별안간 나를 향해 억지 기침을 하며 시위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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