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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0 - 이성부, 하종오, 신동엽

by 장돌뱅이. 2014. 5. 10.


오늘은 곡우(穀雨).
봄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날이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난 봄은 대부분 환희와 부활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을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릴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봄」-

봄비와 함께 생명의 곡식들이 윤택해진다는 날에
나라 안팎으로 아픈 소식들이 줄을 잇는다.

먼 나라에서는 성지순례 길에 나선 무고한 사람들이
누군가의 끔직한 의도로 생명을 잃고,
나라 안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많은 젊은이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만 내려놓는 게 아니라 옆으로도 벌려놓는다.
그렇기에 나무 한 그루의 실뿌리만 끊겨도 온 산의 나무들이 아픈 몸살을 하는 법이다.


   산수유 한 그루 캐어 집에 옮기려고
  
산에 가만가만 숨어들었다.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 밑으로 내려놓았겠지.
  
자그마한 산수유 찾아 삽날을 깊숙이 꽂았다.
  
이제 한 삽 뜨면 산에게서 내게로 올 게다.
  
겨울 내내 집안은 텅 비고 날 찾아오는 이 없었어.
  
이제 마당귀에 산수유 심어놓고
  
그 옆에서 꽃 피길 기다리면
  
이 산이라도 날 찾아오겠지.
  
삽자루에 힘을 주어도 떠지지 않아서
  
뿌리 언저리 손으로 파헤쳐 보았다.
  
산수유는 뿌리를 옆으로 옆으로 벌려놓고 있었다.
  
나는 삽날 눕혀 뿌리 밑을 돌아가며
  
둥그렇게 뜬 뒤 밑동 잡고 들어올렸다.
  
한 그루 작은 산수유 실뿌리 뚜두두둑 뚜두두둑 끊기자
  
산에 있던 모든 산수유들 아픈지 파다닥파다닥
  
노란 꽃망울들 터뜨렸다.
                                
- 하종오, 「초봄이 오다」- 

갑작스럽게 가족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으로
가슴을 찢는 사람들에게 신동엽의 시로 위로를 보낸다.
위로의 무기력과 평온한 나의 오늘 저녁을 사과드리면서. 

   그리운 그의 얼굴 다시 찾을 수 없어도
  
화사한 그의 꽃
  
산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그리운 그의 노래 다시 들을 수 없어도
  
맑은 그 숨결
  
들에 숲 속에 살아갈지어이. 

   쓸쓸한 마음으로 들길 더듬는 행인아.

  
눈길 비었거든 바람 담을지네
  
바람 비었거든 인정 담을지네. 

   그리운 그의 모습 다시 찾을 수 없어도
  
울고 간 그의 영혼
  
들에 언덕에 피어날지어이.
              
-신동엽, 「산에 언덕에」-

*2014년 2월 : 경주에서 대학생 새내기들의 사고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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