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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262

내가 읽은 쉬운 시 27 - 박목월의「윤사월」 출장에서 돌아오니 아파트 화단의 봄꽃이 장관입니다. 아내는 창가로 다가갈 때마다 만개한 꽃들을 내려다보며 “어쩜! 저 꽃 좀 봐!” 하며 감탄을 반복합니다. 그렇게 어느새 사월이 된 것입니다. 송홧가루 날리는 외딴 봉오리 윤사월 해 길다 꾀꼬리 울면 산지기 외딴집 눈먼 처녀사 문설주에 귀대이고 엿듣고 있다 고등학교 2학년 때 교과서에서「윤사월」을 읽었습니다. 시기를 정확히 기억하는 이유는 이 시의 색조를 묻는 중간고사 시험 때문입니다. 그때 나는 “초록”을 답으로 골랐고 정답은 “노랑”이었습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나의 질문에 선생님은 송홧가루와 윤사월, 그리고 꾀꼬리라는 시어가 주는 노란 색감이 시를 관통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수업시간 한 설명을 제대로 듣지 않았다는 약간의 질책성의 어조로.) 나는 .. 2015. 4. 5.
내가 읽은 쉬운 시 26 - 고운기의「좋겠다」 설날이 가까워오네요. 명절이 부담스러워야 어른이라는데 전 아직 추석이며 설날이 좋습니다. 고향으로 가는 사람들에게 혹은 사정이 있어 타향에서 명절을 보내야 하는 사람들에게 고운기 시인의 시를 보냅니다, 저물 무렵 먼 도시의 번호판을 단 시외버스 터미널에서 빠져 나간다 가는 동안 밤을 맞더라도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좋겠다 버스에 탄 사람 몇이 먼 도시의 눈빛처럼 보이는데 손님 드문 텅 빈 버스처럼 흐린 눈빛이라도 집으로 가는 길이라면 좋겠다 집에는 옛날의 숟가락이 소담하게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2015. 2. 12.
내가 읽은 쉬운 시 25 - 나짐 히크메트의「진정한 여행」 연말에 이런저런 송년회가 많았다. 나이가 나이다 보니 대부분의 자리의 주제는 단연 퇴직 문제였다. 법적으로는 정년이 연장되었다 하지만 사기업에선 그것이 60세까지 근무할 수 있다는 보장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자기 사업을 하는 사람들을 제외하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떠나야 할 때'에 부대끼고 있었다. 누구는 업무에서 손을 떼고 무보직의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고, 누구는 자진해서(?) 명퇴 신청을 하였으며, 누구는 끝내 자리를 털고 나오고 말았다. 앞으로 뭘 할거냐고 묻는 물음에 "몰라, 아무 생각 없이 무조건 몇달은 그냥 집에서 쉴래!" 하며 손사래를 치는 친구를 위하여 그리고 그가 지나온 지난 30여 년의 시간을 위하여 박수를 쳐주었다. 가장 훌륭한 시는 아직 쓰여지지 않았다. 가장 아름다운 노래는.. 2015. 1. 11.
내가 읽은 쉬운 시 24 - 문정희의「겨울 사랑」 12월의 첫 날. 출근길. 눈이 내렸습니다. 나로서는 7년 만에 맞아보는 첫 눈이었습니다만, 설렘을 느낄 사이도 없이 매서운 추위가 기세등등하게 들이닥쳤습니다. 바람은 또 얼마나 세차게 부는지요. 추울수록 따스함이 그리워지는 겨울입니다. 봄부터 너무 추운 한 해였습니다. 누군가의 시린 손을 잡아주고 함께 나의 손도 녹여야 할 때입니다. 딸아이의 신혼여행 사진 글에 고정희씨의 시 「겨울 사랑」의 일부를 적었는데, 이번엔 문정희 시인의「겨울 사랑」입니다. 시인들도 겨울엔 자주 사랑을 떠올리는 모양입니다. 눈송이처럼 너에게 가고 싶다 머뭇거리지 말고 서성대지 말고 숨기지 말고 그냥 네 하얀 생애 속에 뛰어들어 따스한 겨울이 되고 싶다 천년 백설이 되고 싶다 *사진은 미국으로 떠나기 전인 7년 전 겨울에 아내와.. 2014. 12. 3.
내가 읽은 쉬운 시 23 - 김상옥의「어느 날」 신혼여행을 마친 딸아이 부부가 '신행'을 다녀갔다. 둘은 먼 남태평양에서 보낸 흔적으로 검게 그을린 피부를 개구장이처럼 뽐냈다. 행복한 모습에 아내와 나도 행복해졌다. 그렇게 딸아이가 우리들의 관계와 공간에서 빠져나가고 아내와 둘이서만 시간을 보낸지 한달이 되었다. 그동안 딸아이가 가족구성원으로 차지하던 점유율이 산술치인 3분의 1 이상이었다는 사실을 절감할 수 있었다. 아내와 딸, 나와 딸, 나와 아내, 그리고 아내와 딸과 나, 이렇게 4종류의 관계에서 아내와 나의 관계만 남게 된 것이다. 아내와 나는 단순하게 변한 일상이 어색했다. 갑작스레 노인이 된 것 같아 아내에게 투정을 부리 듯 장난을 치기도 했다. "뭐야, 우리 이제 이러고 살아야 하는 거야?^^ " 세상의 많은 일들이 "어느 날" 갑자기 오.. 2014. 10. 21.
내가 읽은 쉬운 시 22 - 마흐무드 다르위시의 시 중국 전국시대 양(梁)나라 혜왕(惠王)이 "어지러운 세상을 누가 통일하겠느냐"고 물었다. 맹자가 대답했다. "사람을 덜 죽이는 왕이 통일하게 될 것." 맹자의 말대로 되었던가? 잘 모르겠다. 그래도 어떤 상황에서건 인간의 존엄을 지키는 편에 희망을 걸고 싶다. 가지지구에 대한 이스라엘의 공습이 무자비하다. 천명이 넘는 사람들이 죽었다고 한다. 오래 전 팔레스티나의 시인 마흐무드 다르위시(MAHMOUD DARWISH)가 말했다. "유대인들은 추상적인 것의 위대한 창조자였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의 군대밖에 위대한 것이 없다. 이스라엘은 과거 유대인의 위대성의 무덤이다." 그의 시 한편을 읽어본다. 어머니, 밤입니다. 방랑자가 어디로 도망을 치든 달려드는 배고픈 살인 늑대 같은 그러한 밤이 유령들에게 제 세상.. 2014. 7. 30.
내가 읽은 쉬운 시 21 - 정호승의「발에 대한 묵상」 아내가 발을 다쳤다. 한달이 넘게 약식 기브스를 하고 양의를 거쳐 지금은 한방 치료 중이다. 뼈는 붙었다지만 아직 붓기가 가라앉지 않아 거동이 완전히 자유롭지는 못하다. 덕분에 일상생활에도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귀국 직후에 있게 마련인 국토여행에 대한 심한 갈증을 달래며 외부 활동을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아내 대신 부엌에 서는 일이 많다 보니 나의 요리 메뉴가 몇 가지 더 늘어나기도 했다. 어떤 일이 있고서야 비로소 절실하게 깨닫는 것들이 있다. 건강도 그렇다. 건강은 늘 '당연하거나 당연해야 하는' 것이어서 감사함을 잊고 지내기 쉽다. 그러나 몸 어느 한 부분에 이상이 생기면 그것이 그 부분에 한정된 문제가 아니라 온몸이 함께 아프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건강이외에 이와 비슷한 다른 것들도 함께 생.. 2014. 7. 15.
내가 읽은 쉬운 시 20 - 박남준의「매미의 옛 몸」 여름이다. 덥다. 태풍과 장마 사이 잠시 맑은 하늘은 이른 아침부터 열기를 내뿜는다. 창문을 여니 올 첫 매미 소리가 맹렬하다. 몸부대끼는 출근길의 지하철 안이 또한 열기와 맹렬이다. 여름엔 여름처럼 살 일이다. 매미는 여전하다 아랑곳없이 울어대다니 하긴 그 얼마나 오랜 날들을 어두운 땅속에서 꿈틀거리는 애벌레로 굼벵이로 살아왔던가 날개가 돋아나기까지의 오랜 시간을 생각한다 금선탈각(金蟬脫殼) 나뭇가지 여기저기에 굼벵이의 몸을 벗고 날아오른 등이 찢긴 허물들 거기 바람이 머물 것이다 그 빈 몸속에 각질로 굳은 옛 매미의 몸속에 휘파람처럼 바람이 머물다 갈 것이다 날개처럼 며칠 남지 않은 저 시한부의 절규처럼 그 노래처럼 반짝이며 붙박여 있는 삶이 어쩌면 빈 껍질일지라도 그렇게 꼭 움켜쥐어야 하는 것이라는 듯 2014. 7. 11.
내가 읽은 쉬운 시 19 - 함민복의「흔들린다」 *잠시 거닐었던 대구 수성못 옛 사람들을 만날 때가 있다. 앞선 글의 대구 결혼식에서처럼. 첫 직장의 사람들이라 30년 이상의 인연도 있고 얼굴을 본 지 십여 년이 된 사람들도 있다. 흔히 악수를 나누며 "하나도 안 변했네!" 하는 과장된 덕담을 건네지만 벗겨진 이마나 흰 머리, 주름진 서로의 얼굴에서 어쩔 수 없이 세월의 흔적을 읽어내곤 한다. 그런 자리에는 늘 그 자리에 함께 하지 못한 사람들의 소식도 들을 수 있는 법이어서 대화는 적조(積阻)의 공백을 넘어 수월하게 이어진다. 좋은 소식과 안타까운 소식은 뒤섞여 있으나 누구나 '지지고 볶으며' 생활에 얼룩져 사는 것은 비슷하다. 동물처럼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관계 속에 생활해야 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 이상 티끌 하나 없는 맑은 하늘 같은 삶을 다듬.. 2014. 7.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