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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262

눈 오는 날 올겨울엔 눈이 뜸한 것 같다고 며칠 전 아내와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그렇지 않다는 걸 보여준다는 듯이 폭설이 내렸다. 어제저녁 늦게 아내와 눈을 밟으며 아파트를 한 바퀴 돌았다. 이웃들도 눈을 보러 나와 우리처럼 개구쟁이가 되어 서성거렸다. 손자 친구는 눈사람을 만들었다고 전해왔다 뒤이어 강추위가 왔다. 오늘은 올겨울 들어 가장 춥다. 양지쪽에 쌓인 눈조차 한낮이 되어도 거의 녹지 않는다. 밥을 먹으며 차를 마시며 내다보는 바깥 풍경이 흰빛으로 눈부시다. 내일은 더 추워진다고 한다. 매일 하는 산책을 며칠은 쉬어야 할 모양이다. 작년 이맘때쯤에 비해 3kg 정도가 늘어난 몸무게가 줄어들 이유가 없겠다. 아침으로 감자를, 점심은 비빔국수로 먹고 저녁엔 무얼 준비할까 생각한다. 장자(莊子)에 "재주 가진 자는.. 2021. 1. 7.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또 한 해가 저물었습니다. 세상은 변함없이 많은 일들로 요란스럽고 때로 춥기도 했습니다. 올해 마지막 해가 지기 전에 주머니 속으로 아내의 손을 잡고 강변을 걸으려 합니다. '애써 올라가 미처 내려오지 못하고 꼿꼿해진 생각'일랑 가만히 다독여 강물에 풀어 보내겠습니다. 세상에 사라지는 것은 없다고 했으니 그것들조차도 어딘가에서는 출렁이며 생의 바다를 이루겠지만 말입니다. 백사장 위 발자국을 품은 바다처럼 아늑하고 따뜻한 말로만 채우고 싶은 하루입니다. 바닷가 고요한 백사장 위에 발자국 흔적 하나 남아 있었네 파도가 밀려와 그걸 지우네 발자국 흔적 어디로 갔나? 바다가 아늑히 품어 주었네 -김명수, 「발자국」- 2020. 12. 31.
평화의 땅에서 영광의 하늘로 *명동성당 성탄절 미사 (TV 화면 촬영) 내 생의 기도는 단 하나, (THERE IS ONLY ONE PLAYER IN MY LIFE) , 땅에서와같이 하늘에서도 (AS ON EARTH, SO TOO IN HEAVEN.) 삶에서와같이 영혼에서도 (AS IN LIFE, SO TOO IN THE SOUL.) 나에서와같이 세상에서도 (AS IN ME, SO TOO IN THE WORLD) -박노해의 책, 『푸른 빛의 소녀가』 중에서- 저희도 이런 기도를 올릴 수 있게 하소서! 2020. 12. 28.
야트막한 사랑의 하루 *카스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 (CASPER DAVID FRIEDRICH), 「겨울풍경」, 1911년경 사내는 먼길을 걸어왔나 보다. 멀리 성당의 실루엣이 여명 속에서 어슴푸레 보이는 거로 보아 아마 밤을 새워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지치고 힘들어 한 걸음도 더 내디딜 수 없었는지 차가운 눈밭 위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 목발인 것도 같고 지팡인 것도 같은, 그가 걸으며 의지했을 나무 막대기조차 함부로 눈 위에 던져놓은 채로. 자세히 보면 사내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초록의 전나무 앞에 십자가도 보인다.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으며 어떤 간절함으로 기도를 하는 것일까?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어서 해가 떠올라 사내를 따뜻한 기운으로 감싸주었으면 싶다. 삶은 원래 견디는 것이라지.. 2020. 12. 24.
내일부턴 낮이 길어진다 동짓날이다. "팥죽 해 먹을까?" 나의 말에 아내는 올해는 애동지라서 팥죽 대신에 팥떡을 먹어야 한다고 했다. 나로서는 처음 들어보는 말이었다. 검색을 해보았다. 동지가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들면 중동지, 하순에 들면 노동지라고 한다. 12월 21일 오늘은 음력으로 11월 7일이라 애동지가 된다. 중동지와 노동지에는 팥죽을 쑤지만, 애동지에는 팥죽 대신 팥떡을 먹는다. 애동지에 팥죽을 먹으면 아이들이 병에 잘 걸리고 나쁜 일이 생긴다는 속설이 있기 때문이다. 동네 단골 떡집에 갔더니 팥시루떡이 다 팔려 추가로 만들고 있다고 한다. 나만 모르고 다른 사람들은 애동지를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아직 겨울이 한참 남았지만, 동지는 겨울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기분을 느끼게 한다. 1년 중 밤.. 2020. 12. 21.
퍼옴 <검찰 권력 해체를 촉구하는 작가 성명> *콜비츠 (Kathe Kollwitz) : 「봉기」, 1899년 판화 콜비츠는 "나는 냉정한 태도로 작품을 만들어 본 적이 없다. 차라리 내 피를 끓이며 작업을 했다고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내 작품을 보는 사람들은 그것을 분명히 느낄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시인 소설가 등 작가 654명이 을 발표했다. 현실에 대한 직접적인 발언도 '피를 끓이는' 작업이리라 믿으며 옮겨본다. 〈검찰 권력 해체를 촉구하는 작가 성명〉 촛불의 함성은 살아있다. 2016년에 타오른 수천만 개의 촛불은 박근혜와 최순실의 국정농단을 해결하기 위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것은 범국민적인 사회개혁 투쟁이었다. 촛불 시민들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모순이 기득권 세력들의 ‘편법과 기만’, ‘독점과 부조리’부터 기인한 것이라고 보고 .. 2020. 12. 18.
이창동 감독의『버닝』 모든 영화 감상글이 그렇겠지만 『버닝』은 더욱 영화를 보고난 후에야 어떤 설명이든 구체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장면 장면의 디테일 - 색상, 음악, 배우의 표정과 시선, 그리고 많은 대사에 은유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다운 탄탄한 구성의 줄거리를 갖고 있지만 그 요약만으로는 이 영화에 대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영화 『버닝』에는 종수와 해미, 그리고 벤이라는 3명의 젊은이가 나온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종수는 현재 배달 알바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의 대남 스피커 방송이 들려오는 파주의 시골 마을에서 소를 키우며 살다가 공무를 집행하는 공무원에 상해를 입힌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젊은 시절 중동에서 돈을 벌어온 아버지에게 아파트에 투자할 것을 권했으나 농사.. 2020. 12. 10.
나의 삶을 떠받쳐 준 *클림트 「키스」(1907∼1908) 아내가 대장 내시경 검사 도중 조직검사를 받았다. 용종 몇 개라면 우리 나이에 흔해서 대수롭지 않지만 조직검사는 뭔가 심각한 상태를 상상하게 했다. 농담을 하고 산책을 하고 손자를 보는 평소와 다름없는 일상 속으로 혹시나? 하는 불길함이 불쑥불쑥 찾아들었다. "조직검사 했다고 다 암인가? 나도 두 번이나 했잖아?" 나의 경험과 말로 묵직한 분위기가 말끔하게 가실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무 일 없을 것이라 자꾸 반복하는 것이 오히려 걱정을 강조하는 꼴이 될까 해서 가급적 다른 이야기를 했다. 영화를 보고 손흥민의 원더골도 봤다. 겉으로는 태연했어도 어쩔 수 없이 기도할 땐 더 절실한 마음이 되었다. 드디어 오늘! 의사와 마주 앉았다. 긴장하는 순간, '조직검사 결과 .. 2020. 12. 9.
11월의 식탁 하루 한 번 묵주기도를 올리는데 분심(分心)이 가득하다. 중간에 다른 생각을 따라가다 황급히 돌아오지 않고 집중해서 끝내본 적이 거의 없다. "내가 기도를 받는 입장이라면 '야 정신 사납다. 그 따위로 기도할려면 치워라'하고 돌아앉을 것 같다"고 아내에게 이야기 하니 웃는다. 그래서 간단명료하고 짧은 화살기도를 자주 올리기로 했다. "오늘 끓이는 콩나물국이 맛있게 해주세요." "아내와 하는 산책을 무사히 마치게 해주세요." "마트에서 맛있는 귤을 고르게 해주세요." 산만해질 틈이 없어 좋긴 하지만 너무 쪼잔한 것도 같다. 거룩한 것은 그렇듯 단순하다 숟가락 하나 들었다 놓는 일 세상에서 가장 큰 문은 사람의 입 그 문 열고 닫는 열쇠도 숟가락 -복효근, 「숟가락을 위하여」 부분- 시인은 거룩한 것은 단순.. 2020. 12.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