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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262

보슬비의 속삭임 눈을 돌리는 곳마다 어질어질 봄꽃이 흐드러졌다. 잠시 현기증을 달래려는 듯 아침부터 내리는 봄비가 차분하다. 비가 그치면 봄풀과 꽃들은 더욱 왕성하게 피어날 것이다. 나는 나는 갈 테야, 연못으로 갈 테야. 동그라미 그리러 연못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테야, 꽃밭으로 갈 테야. 꽃봉오리 만지러 꽃밭으로 갈 테야. 나는 나는 갈 테야, 풀밭으로 갈 테야. 파란 손이 그리워 풀밭으로 갈 테야. -강소천, 「보슬비의 속삭임」- 손자친구와 아파트 근처 공원을 뛰어다니다 화사한 큰 나무들의 꽃들 아래에 올망졸망 모여서 예쁘게 피어나고 있는 작은 꽃들을 보게 되었다. 봄은 봄 아닌 것들을 없게 한다던가. 왜 이 작고 앙증맞은 꽃의 이름이 "큰개불알꽃"인지 모르겠다. 일본인들이 붙인 이름을 그대로 번역한 탓이라는.. 2021. 4. 3.
그러지 못할 수도 있는 날을 위해 아내와 함께 『죽음을 배우는 ― 시간』이란 책을 읽었다. 현직 의사며 교수인 저자인 김현아 씨가 의료 현장에서 수많은 죽음을 목격하며 고민하게 된 '존엄사'에대한 연구를 담은 책이다. 책은 "병원 현장에서 환자나 그 가족은 끝없이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의료 서비스에 집착하고 의료진들은 의료분쟁의 위험을 피하고자 방어진료를 하지 않을 수 없는" 현실과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한 인간으로서 삶을 잘 마무리하는 시간을 가지지 못하고 생의 마지막 순간까지 연명 의료에 매달리는 한국인의 임종 문화"에 대해 다양하고 구체적인 사례와 함께 현실감 있는 설명을 담고 있었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예외 없이 일어나는 최대의 사건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일생 일대의 사건에 대해 새 자동차를 구입할 때보다도 준비를 덜.. 2021. 4. 2.
소파에서 잠든 아내 후기 인상파 화가 피에르 보나르 (Pierre Bonnard, 1867 ~ 1947)는 자유로운 색채와 독특한 선의 사용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는 아름다운 풍경화, 정물화, 실내화를 많이 그렸다. 특히 여성 누드를 여러 점 그렸는데 모델은 부인인 마르트(Marthe)였다. 마르트는 사람들과 만나기를 꺼려하고 개와 고양이와 함께 집안에서만 지내는 독특한 여자였다. 외출할 때는 양산으로 가리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마르트는 질투심이 많고 손님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욕실에 들어가는 괴팍함도 있었다. 보나르는 그런 아내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가 지내기에 편한 집을 구했고 목욕탕을 꾸며 주었다. 그리고 마르테의 일상과 목욕하는 모습을 자주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그는 평생 아내의 그림을 무려 384점이나 그렸다.. 2021. 3. 25.
소고기 버섯 들깨 덮밥 내 경험으로 혹은 내 입맛으로 들깨가 들어가서 맛없는 음식은 없다. 같은 음식이라도 들깨가 더 많이 들어간 것을 좋아한다. THE MORE, THE BETTER다. 그래서 순대국밥, 돼지국밥, 추어탕, 뼈다귀 감자탕, 순두부 등을 먹을 때 들깨를 듬뿍듬뿍 넣는다. 튀김을 좋아하는 사람은 신발을 튀겨도 맛있다고 한다던가? 내겐 들깨가 그렇다. 기름도 참기름보다 들기름을 좋아한다. 신 김치를 볶을 때나 김치 볶음밥을 만들 때 들기름을 선호한다. 아내는 나와 반대다. 참기름으로 볶은 걸 더 좋아한다. 어렸을 적 부모님이 참깨 농사를 지으셨는지 기억에 없다. 들깨는 꽤 많이 심으셨던 것 같다. 수확이 가까운 들깨밭을 동네 친구들과 전쟁놀이로 뛰어다니다 쑥대밭으로 만든 탓에 어른들에게 치도곤을 당한 기억이 있기 .. 2021. 3. 22.
춘분 지난 금요일 모처럼 미세먼지도 사라지고 기온도 푸근해서 손자친구와 밖에서 오래 놀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킥보드를 타고 아파트에서 멀리 나가보았다. 놀이터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아이들틈에 섞여 미끄럼틀을 타보기도 했다. 그네를 타던 친구가 자기 신발을 벗어 옆 그네에 올려달라고 했다. 주위 아이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내 발을 보호해주는 신발도 그네 태워주는거야 " 친구의 말에 아이들과 함께 나도 킥킥 웃었다. "이제 정말 봄이 온 것 같다!" 내가 말하자 친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진짜 봄은 20일부터야." 유치원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쳐주었단다. 3월 20일? 뭐지? 잠깐 생각해 보니 춘분이었다. 절기 상으로는 한 달 전에 입춘이 지났지만 춘분이 가까워서야 날이 풀린다는 게 선생님의 의.. 2021. 3. 21.
『자기 앞의 생』 넷플릭스를 살펴보다 낯익은 제목의 영화를 보게 되었다. 「자기 앞의 생(LA VIE DEVANT SOI, THE LIFE AHEAD」. 얼마 뒤 동네 도서관에 갔다가 우연히 그 책을 또 보게 되어 빌려왔다. 에밀 아자르의 『자기 앞의 생』은 70년 대 후반 인기가 있던 소설이었다. 소설의 내용을 노랫말로 담은 노래 "모모"가 대학 가요제에서 입상할 정도였다. 맑고 순수한 사랑 이야기에 콩쿠르상 수상작이라는 후광이 더해졌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사랑이야기를 상큼하고 따뜻하게 풀어나갔다고 그 무렵 활동하던 동아리 회원들과 감상을 나누었던 기억이 있다. 여기서 사랑은 남녀 간의 그것이 아니라 어린 소년과 노인, 프랑스와 아랍 혹은 아프리카, 백인과 흑인, 기독교와 회교의 간격을 메우는 좀 더 보편적인 사랑을 말.. 2021. 3. 7.
그런 사람들 층층의 바위 절벽이 십리 해안을 돌아나가고 칠산바다 파도쳐 일렁이는 채석강 너럭바위 위에서 칠십 육년 전 이곳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해산 전수용을 생각한다 산낙지 한마리에 소주를 비우며 생사로서 있고 없는 것도 아니요 성패로써 더하고 덜하는 것도 아니라던 당신의 자명했던 의리와 여기를 떠난 몇 달 후 꽃잎으로 스러진 당신의 단호했던 목숨을 생각한다 너무도 자명했기에 더욱 단호했던 당신의 싸움은 망해버린 국가에 대한 만가였던가 아니면 미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이었던가 예언으로 가는 길은 문득 끊겨 험한 절벽을 이루고 당신의 의리도 결국 바닷속에 깊숙이 잠기고 말았던가 납탄과 천보총 몇 자루에 의지해 이곳 저곳을 끈질긴 게릴라로 떠돌다가 우연히 뱃길로 들른 당신의 의병 부대가 잠시 그 아름다움에 취했던 비단.. 2021. 3. 1.
서울숲 산책 아내와 서울숲을 걸었다. 날씨는 우중충했지만 기온은 벌써 봄이었다. 공원길에는 여느 때보다 사람들이 많았다. 코로나로 멀리 가기 힘들고, 5인 이상 모일 수도 없는 상황이다 보니 너도나도 가까운 공원으로 나온 것 같았다. 서울숲 근처 대부분의 카페는 젊은이들로 가득했다. 이름난 빵집과 음식점 앞에는 차례를 기다리는 긴 줄이 늘어서 있기도 했다. 우리도 자주 가는 카페의 야외 좌석에 앉아 커피를 나눌까 생각했지만 막상 가서 보니 사람들이 너무 많아 엄두가 나지 않았다.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북적임이 비로소 사람 사는 세상 같았다. 코로나의 위험성을 염려하지 않고 저런 풍경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사람이 풍경으로 피어날 때가 있다 앉아 있거나 차를 마시거나 잡담으로 시간에 이스트를 넣거나.. 2021. 3. 1.
죽음에 대하여 구순(九旬)을 맞은 아버지에게 한 아들이 축하의 말을 전했다. "아버지 건강하셔서 백수(白壽)를 누리세요." 그 아들이 자리를 비운 사이 뭔가 찜찜한 아버지의 기분을 눈치챈 다른 아들이 나섰다. "아버진 건강하시니 백오십 살까지 전혀 문제없으실 겁니다." 그러자 아버지의 얼굴이 펴졌다. "암 그래야지. 고연 놈 같으니라고. 나보고 앞으로 겨우 십 년만 더 살라고 하다니······" 친구에게 들은 실화이다. 오래 살고 싶다는 인류의 오랜 꿈은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 100세 시대를 넘어 200세 시대가 도래할 것이라는 이야기도 마냥 황당해 보이지만은 않는다. 1960년도 우리나라 사람들의 (기대) 수명은 56세였다. 2020년에는 무려 83세가 되었다. 식단 개선, 의술 발달, 건강에 대한 관심 증가 등.. 2021. 2.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