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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262

겨울이 서있다 아내는 이런저런 김치로 김치냉장고를 채우고 겨우살이 준비를 마쳤다고 흡족해 했다. 김치를 만들고 남은 무청은 버리기 아깝다며 삶아 베란다 건조대에 말렸다. 말라가는 시래기에서 겨울 냄새와 분위기가 느껴진다. 시래기로 무슨 음식을 만들까 알아봐야겠다. 어릴 적 어머니도 겨울이 다가오면 월동준비로 부산해지셨다.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양의, 종류도 다양하게 김장김치를 만드시고 연탄을 광에 가득 채우셨다.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로 함께 모여 김장을 하던 날의 떠들석한 분위기가 생각난다. 남자들은 뒷마당에 김장독을 묻을 땅을 파고 김장 양념에 굴을 더해 막걸리를 마셨다. 나는 뒷방에서 친구들과 고소한 배추 꼬랑지를 깎아먹었다. 요즈음 배추는 꼬랑지가 없다. 빼꼽만하게 남은 자리로 보아 있어도 먹을 게 없을 것 .. 2020. 12. 1.
실패 없는 것만을 추구해선 코로나가 가속화 시킨 택배 문화. 아내도 가끔씩 주문을 한다. 배달된 물건 사이에 짧은 글을 적은 엽서가 들어 있었다.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의 저자 하완의 글이었다. 호기심은 어떤 행위를 하게 하는 가장 강력한 동기다. 설령 그것이 위험하고 무모하다 할지라도. 왜 공포 영화에 나오는 인물들은 얼핏 봐도 위험해 보이는 걸 열어보다가 죽질 않나. (···) 처음부터 "내 취향이야." 하는 것들이 있다. 하지만 어떤 취향은 한 번에 얻어지지 않고 여러 번 시도한 끝에 얻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첫인상만으로 안 맞는다고 단정짓고 멀리하는 건 조금 아까운 일이다. 물론 여러 번 시도한 후에도 여전히 싫을 수 있다. 하지만 한 번의 시도로 거부한 것이 평생 즐길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었을지 누가 아는가. 우.. 2020. 11. 26.
수제비 당기는 날 가을비가 유난히 요란했다. 아파트 단지 내에 눈부셨던 단풍들을 훑어내 듯 떨어뜨렸다. 내일부턴 기온도 뚝 떨어진단다. 겨울이 한걸음 더 다가선 것이겠다. 늦가을 비와 감미로운 '배고픔'. '속살까지 뜨거워지는' 한 그릇 수제비가 당기는, 아니 '땡기는' 하루였다.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 이명윤의 시 - 내 마음의 강가에 펄펄, 쓸쓸한 눈이 내린다는 말이다 유년의 강물 냄새에 흠뻑 젖고 싶다는 말이다 곱게 뻗은 국수도 아니고 구성진 웨이브의 라면도 아닌 수제비 먹으러 가자는 말 나 오늘, 원초적이고 싶다는 말이다 너덜너덜해지고 싶다는 뜻이다 하루하루 달라지는 도시의 메뉴들 오늘만은 입맛의 진화를 멈추고 강가에 서고 싶다는 말이다 어디선가 날아와 귓가를 스치고 내 유년의 처마 끝에 다소곳이 앉는 말.. 2020. 11. 19.
2020년 10월의 식탁 코로나에 이어 손자친구 2호가 태어나면서 3대가 식사를 하는 기회가 이전보다 많아졌다. 그에 따라 내가 조리 가능한 음식의 종류가 점차 한계를 드러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몇 가지 종류를 반복해서 만들어내고 있음을 사진을 보며 느낀다. 게으름에 타성이 더해진 까닭이다. 11월부터는 한 주에 최소 한 가지씩은 새로운 음식을 만들어야겠다고 다짐을 해본다. 누군가 죽어서 밥이다 더 많이 죽어서 반찬이다 잘 살아야겠다. -나태주 「생명」- 밥을 먹으면 손자는 기운이 난다며 두 손을 어깨 위로 뻗치며 "불끈 불끈 팡팡!"을 외친다. 반찬을 먹어 딸아이는 새로 태어난 생명에게 젖을 준다. 잘 만들어야겠다. 2020. 11. 12.
동요 불러주기 둘째가 태어나면 첫째가 '영역 보호'라는 본능적 시샘이나 투정이 있지 않을까 예상했던 대로 변화된 환경에 첫째는 예민하게 반응하고 있다. "동생 보느라고 내 말은 잘 안 들어준다"던가, "왜 동생한테는 모두 다 양보를 해야 하나"라는 식의 이전엔 없던 말을 자주 한다. 직접적인 불만을 드러내지 않더라도 아내가 둘째를 안아주거나 어르는 말을 허투루 보지 않는다. 자신에게만 집중되어 있던 가족의 관심이 다른 곳으로 분산되는 것에 꽤 스트레스를 받는 모양이다. 첫째와 가장 친한 친구인 나는 둘째를 안아주거나 분유를 먹여주는 일은 아예 삼가하고 있다. 둘째에 대한 갈증은 첫째가 유치원에 가 있는 '노마크'(?) 찬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조심스럽게 둘째를 품 안에 안고 포근한 중량감을 느끼며 안방에서 거실로,.. 2020. 10. 24.
영화 『액트 오브 디파이언스』 넬슨만델라는 1963년 이미 5년 형을 받고 복역 중인 상태에서 '리보니아(Rivonia) 사건'으로 다시 법정에 선다. 요하네스버그 인근 리보니아의 한 농장에서 모임을 갖던 무장 저항 단체인 "민족의 창(Umkhonto we Sizwe : Spare of the Nation)"의 조직원들이 체포되고 리더였던 만델라도 기소된 것이다. 1964년 4월 20일 만델라는 법정 최후 진술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르는 독재권력과 싸우기 위해 폭력적인 투쟁 방법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비폭력주의자인 자신과 동료들의 입장을 설명하며 자신이 관계하고 있던 단체의 성격과 목표, 공산당과의 관계 등을 밝힌다. 이 유명한 진술은 "나는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다"로 끝난다. "나는 백인들에 의한 흑인 지배와 싸워왔고 또.. 2020. 10. 23.
2020년 9월의 식탁 둘째 손자친구가 태어나면서 9월에는 딸아이집에 가는 횟수가 더 많았다. 10월에는 더 많아질 지도 모르겠다. 익숙한 음식에서 벗어난 새로운 메뉴 개발의 필요가 더 커졌다. 평소 혼자서 밥을 잘 먹는 손자친구는 할머니 앞에서는 먹여달라고 한다. 아내가 먼저 자청한 일인지도 모른다. 교육적으로는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게 좋다. 처마 밑 둥지의 제비처럼 밥을 먹여주고 받아먹는 할머니와 손자의 모습은 평화롭다. 거기에 서로의 '숟가락과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시간은 세상을 사는 힘이다. 숟가락과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에 간밤에 애써 잠든 그러나 내 새벽잠을 깨운다 점점 열심히 따스하게 들려오는 숟가락과 밥그릇이 부딪치는 소리가 옆집 어디선가····· 아 그 소리가 좋아라 -이선관의 시, 「.. 2020. 10. 3.
창밖에는 비오고요 구름으로 하늘이 어둑어둑하다. 비가 내리고 바람도 세차게 분다. 을씨년스런 강변엔 남자와 여자 그리고 작은 개가 어딘가를 향해 걸어가고 있다. 모자를 쓴 사내는 몸을 웅크린 채 우산에 의지하여 맞부딪쳐오는 비바람을 막아보려 애를 쓰는 모습이다. 하지만 속절없이 이미 몸이 다 젖었을 것 같다. 여자도 바람과 반대 방향으로 걸을 뿐 상황이 크게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무슨 일이 있어 이 궂은 날씨에 길을 나선 것일까. 모진 걸음의 끝에는 따뜻한 위로와 향기로운 차 한 잔이 기다리고 있을까? 살다보면 예상치 못한 비바람과 마주서거나 일상의 등짐이 무거워지는 시간을 만나게 된다. 특별한 이유가 없이 하루가 유난히 무겁게 흘러가기도 한다. 그럴 때 '또 한 번만 지면 다 진다'는 아이의 긍정적인 다짐을 떠올려 본다.. 2020. 9. 18.
다시『서편제』를 읽고 보다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를 다시 읽고 다시 봤다. 두 가지 모두 오래 전에 감상했던 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몇몇 대목을 빼곤 마치 처음 접하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대부분 경우 내게 소설이 주는 감동에 못미쳤다. 그러나 『서편제』의 경우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메시지 전달 방식이 다를 뿐 감동의 묵직함은 같았다. 원작자 이청준이 말했듯 소설과 영화는 제목만 같을 뿐 별개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두 가지 『서편제』와 함께 하는 동안 등장 인물들의 굴곡진 삶과 남도의 서정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특히 영화는 남도 판소리의 구성진 가락과 그에 어울린 정제된 영상이 애잔함과 황홀함을 동시에 안겨주었.. 2020. 9. 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