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겨울이 서있다

by 장돌뱅이. 2020. 12. 1.




아내는 이런저런 김치로 김치냉장고를 채우고 겨우살이 준비를 마쳤다고 흡족해 했다.
김치를 만들고 남은 무청은 버리기 아깝다며 삶아 베란다 건조대에 말렸다.
말라가는 시래기에서 겨울 냄새와 분위기가 느껴진다.
시래기로 무슨 음식을 만들까 알아봐야겠다.

어릴 적 어머니도 겨울이 다가오면 월동준비로 부산해지셨다.
지금 생각하면 어마어마한 양의, 종류도 다양하게 김장김치를 만드시고 연탄을 광에 가득 채우셨다. 
마을 사람들이 품앗이로 함께 모여 김장을 하던 날의 떠들석한 분위기가 생각난다.
남자들은 뒷마당에 김장독을 묻을 땅을 파고 김장 양념에 굴을 더해 막걸리를 마셨다.
나는 뒷방에서 친구들과 고소한 배추 꼬랑지를 깎아먹었다.
요즈음 배추는 꼬랑지가 없다. 빼꼽만하게 남은 자리로 보아 있어도 먹을 게 없을 것 같다.

12월 1일, 올 마지막 달의 첫날이다.
절기 상 입동(立冬)이 지난지는 제법 되었지만 실제적인 겨울과 만나는 건 지금부터겠다.
계절을 알리는 말에는 들어갈 입(入)을 쓰지 않고 서있다는 입(立)을 쓴다.
계절은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늘 거기 그렇게 서있고 우리가 시간을 따라 그 속을 지난다는 뜻일까?
먼길 가는 나그네처럼 뒤돌아보 거나 산 넘어 풍경을 서둘러 짐작할 것 없이 
눈앞에 보이는 지금 바로 이 순간의 작은 일에만 집중하자고 생각해 본다.

날이 춥다. 어제 저녁 손자친구는 콧물을 흘렸다.
요즈음 시국에 콧물은 단순 감기라도 주변을 긴장시킬 수밖에 없다.
오늘은 유치원을 마친 친구가 놀이터에서 놀지 않고 바로 집으로 가도록 설득하는 게
내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이다.


눈비 들이치면 무를 못 먹는다기에
텃밭 귀퉁이를 판다
삽날에 찍혀 달아났다가 절뚝절뚝 되엉기는,
시래기 타래에 튕겨나온 햇살이
무 구덩이 맨흙 위에 쏠린다
아작아작 씹혀도 몸뚱이밖에 없는 요놈들 자리
햇살을 골고루 펴서 깔아야겠지
고뿔 들지 말라고 흙으로 봉을 올리고
짚으로 두툼하게 덮어주리라
흙에 검불이 섞이면 무가 썪는다기에
삽날에 들러붙는 검불을 떼어넨다

-이병초, 「입동(立冬)」- 

'일상과 단상 > 내가 읽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나의 삶을 떠받쳐 준  (0) 2020.12.09
11월의 식탁  (0) 2020.12.03
실패 없는 것만을 추구해선  (0) 2020.11.26
수제비 당기는 날  (0) 2020.11.19
2020년 10월의 식탁  (0) 2020.11.12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