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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이창동 감독의『버닝』

by 장돌뱅이. 2020. 12. 10.


모든 영화 감상글이 그렇겠지만  『버닝』은 더욱 영화를 보고난 후에야 어떤 설명이든 구체성을 느낄 수 있을 것 같다.
장면 장면의 디테일 - 색상, 음악, 배우의 표정과 시선, 그리고 많은 대사에  은유와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이창동 감독다운 탄탄한 구성의 줄거리를 갖고 있지만 그 요약만으로는 이 영화에 대해 얻을 수 있는 것이 많지 않다.

영화 『버닝』에는 종수와 해미, 그리고 벤이라는 3명의 젊은이가 나온다.

문예창작과를 졸업한 종수는 현재 배달 알바생이다.
그의 아버지는 북한의 대남 스피커 방송이 들려오는 파주의 시골 마을에서 소를 키우며 살다가 
공무를 집행하는 공무원에 상해를 입힌 혐의로 구속되어 재판을 받고 있다.
젊은 시절 중동에서 돈을 벌어온 아버지에게 아파트에 투자할 것을 권했으나 농사일에만 고집스럼게 매진했다고
시류에 편승하지 못한 아버지의 삶을 동창은 어리석다고 비아냥거린다.
어머니는 종수가 어렸을 적 집을 나갔다.
종수가 떠맡은 것은 허름한 집과 송아지 한 마리, 낡은 트럭 한 대 뿐이다. 한 마디로 종수는 '흙수저'의 인생이다.

종수의 릴 적 동네 친구인 해미는 내레이터모델이다. 
돈을 모아 여행을 다니고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실상은 카드빛 때문에 가족과도 연락을 끊고 산다.
해미가 사는 곳은 하루 한 번 남산타워 유리창에 빛이 반사되어 들어오는 작고 어두운 방이다

벤은 해미가 아프리카를 여행하면서 만난 '금수저'이다. 이름부터 종수나 해미와는 다르다.
종수가 직업이 뭐냐고 묻자 "간단히 말하면 그냥 노는 거예요"라고 답한다.
그러면서도 고급 승용차 몰고 강남 반포의 호화로운 집에 산다. 

"재미 있으면 난 뭐든지" 한다는 벤은 어른이 되고 나서는 한 번도 운 기억이 없는 사람이다.

영화는 종수와 해미 사이에 벤이 끼어들면서 긴장이 쌓이기 시작한다. 벤은 자신의 집으로 종수와 해미를 초대한다.
벤은 '생각하고 원하는 걸 마음대로 만들고 먹을 수 있어' 직접 음식을 만든다고 말한다.
'내 마음대로'라는 말이 자신의 위치와 능력에 대한 확신을 보여주는 것 같다.

해미가 벤과 가까이 지내는 것에 불편해지기 시작한 종수가 "저 남자가 널 왜 만나는 거 같냐?"고 묻자
해미는 "오빠가 나 같은 사람을 좋아한대
, 흥미있대"라고 한다.
거리감이 있는 표현이다. 동등한 관계의 '사랑한다'와는 차이가 있다.

벤은 종수와 해미를 자신의 '금수저' 모임에도 초대한다. 그곳에서 해미는 아프리카 여행담을 진지하게 이야기 하며
부족 춤까지 추지만 분위기는 마치 귀여운 '재롱'을 구경하는 듯하다. 게다가 벤은 하품을 하며 바라본다. 
종수는 그런 모습도 불편해진다.


어느 날 벤은 종수에게 자신에게 2달에 한 번쯤 낡고 쓸모 없어진 비닐하우스를 태우는 취미가 있다고 말한다.
한국에는 너무 많아서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는, 비닐 하우스들을 '마치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사라지게 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남의 것에 대한
범죄 아니냐며 묻는 종수에게  '대한민국 경찰은 그런 일에 신경을 안 쓴다'고 대수롭지 않게 받는다.
오히려 태워주기를 기다리고 있다고도 한다. 비가 내려 홍수가 났다고 비에게 잘못을 물을 수 없는 것과 같이
자신의 행위는, 반포와 파주, 서울과 아프리카에 동시에 존재하는, 자연의 도덕 같은 것이라는 말도 덧붙인다.
그에게는 마치 반복되는 일상처럼 자연스러운 행위인 것 같다.
(종수와 해미는 벤에게 비닐하우스 같은 존재일까? 무기력하고 존재감도 없이 많기 만한 잉여의?)

종수는 벤에게 해미를 사랑하고 있다고 진지하게 고백하지만 벤은 그저 웃을 뿐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는다.
관심 밖이라는 태도이다. 아니면 사랑이라는 말에 익숙하지 않은 건지도 모르겠다.
해미에 대한 애정과 벤에 대한 열등감으로 종수는 해미에게 불만을 토로한다.

화가 난 해미는 벤의 차를 타고 떠나고 이후 해미는 갑자기 자취를 감춘다.
다시 만난 벤은 종수 집 근처의 비닐하우스를 하나 더 태웠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자신이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확인하였으므로 그럴 리 없다고 부인하는 종수에게 벤은
"원래 너무 가까우면 안 보인다"고 말한다.

태워버린 비닐하우스처럼 해미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흔적을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렸다.
키운다던 고양이(먹이)가 사라지고 방은 이전과 다르게 깨끗히 정리되었고 문의 비밀번호도 바뀌었다. 

종수는 확실한 근거는 없지만 벤을 의심하며 추적을 시작한다. 벤은 무관심 한 듯 새로운 여자친구를 만난다.
이후 영화는 종수의 해미를 찾기 위한 박한 노력과 절망적인 분노로 가파르게 치닫는다.

줄거리만 보면 흙수저와 금수저의 공존과 갈등이 전부인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물론 그런 의도도 있겠지만 그것은 영화의 부분이고, 결론 아닌 영화의 마지막에 이르는 과정일 뿐이다. 
이 영화는 좀 더 중의적이다. 다양한 상상과 해석의 여지를 관객들에게 열어주고 있다.
모호함이 중첩되지만 처음부터 그런 의도로 만들어졌다.

지금 젊은이들은 자기 부모 세대보다 더 못살고 힘든 최초의 세대다. 지금까지 세상은 계속 발전해 왔지만
더 이상 좋아질 것 같은 느낌이 없다
. 요즘 세대가 품고 있는 무력감과 분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며,
"젊은이들이 요즘 세상을 바라보면 세상이나 자기 삶에 대한 생각이 아마 이해할 수 없는 미스터리 같은
것이 아닐까" 하는 
의도로 만들어진 영화라고 이창동 감독은 말했다.

'이해할 수 없는 미스테리'.
젊은이들만 그런 것이 아니라 나이든 우리 세대로서도 지금의 세상은 이해하기 힘든 미스테리 같다.
그동안 우리 사회는 경제화나 민주화라는 거대 명분이 분명하게 지배했다.
그러나 이제는 그 결과가 일정 수준으로 안착되면서 계층이 분리 고정되고 다시 내적 분화가 가속화 되고 있다.
탈중심적으로 문화가 다변화되고 '이념과 욕망이 무의식 수준에서 결합'되어 복잡하게 얽혀 있다.   
정답이 분명했던 객관식 시험의 시대가 정답이 없는 주관식 토론의 시대가 된 것이다.
더불어 자신과 타인의 정체성에 대한 설명은 물론 생존의 방식도 모호해졌다.
문창과 출신답게 소설을 쓸 거라는 종수는 세상이 수수께끼 같아 무슨 소설을 써야할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영화 속 몇 장면을 더 돌아본다.
인용 장면끼리, 혹은 영화 전체와 가진 연관성을 명확히 해석해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그건 내 능력 밖이다.

토마임(PANTOMIME, 무언극)을 배우러 다니는 해미는 무언극을 잘 하기 위해서는
"여기에(손에)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귤이 없다는 것을 잊어버려야 한다"고 말한다.
(존재하지 않는 것 자체를 잊으면 얻어지는 것은 무엇일까?  아니 얻어지는 것만 있을까?
반대로 없는 것을, 결핍을 망각하지 않아야 우리는 말을 할 수 있는 것 아닐까?)

해미는 아프리카를 여행할 거라며 종수에게 그동안 자신이 기르는 고양이를 돌봐달라고 부탁한다.
종수는 해미의 자취방에 가서 고양이 먹이를 놓고 오지만 한 번도 고양이를 보지 못한다.
다만 먹이가 없어지고 배설물만 확인할 수 있을 뿐이다. 나중에 집주인도 고양이의 존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래도 해미는 분명히 있다고 보일이라는 이름까지 알려준다.
종수는 "고양이가 없다는 사실을 잊으면 되는 거지?"라고 말한다.
(존재하지만 실체가 없는 것? 혹은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있는 것 같은 허상?
우리가 사는 세상의 무엇이 그럴까?
)

해미의 아프리카 여행담에는 '리틀 헝거'와 '그레이트 헝거'가 있다. '리틀 헝거'는 1차원적인 의미 그대로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채워지지 않는 삶의 의미에 대한 배고픔을 느끼는 사람이다.
(종수는, 해미는, 벤은  각각 어떤 헝거일까?)


적다보니 따분·지루한 영화 같지만 『버닝』은 상영 시간 2시간30분이 짧게 느껴질 만큼 속도감 있게 지나간다.
개인적으론 봉준호 같독의 『기생충』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는 영화였다.

아무튼 영화를 보고 나니 문득 떠오른 시가 있어 옮기는 것으로 '미스테리' 같은 횡설수설을 마쳐야겠다.

우리들의 적은 늠름하지 않다 
우리들의 적은 카크 다글라스나 리챠드 위드마크 모양으로 사나웁지도 않다
그들은 조금도 사나운 악한이 아니다
그들은 선량하기까지도 하다
그들은 민주주의자를 가장하고
자기들이 양민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선량이라고도 하고
자기들이 회사원이라고도 하고
전차를 타고 자동차를 타고
요리집엘 들어가고
술을 마시고 웃고 잡담하고
동정하고 진지한 얼굴을 하고
바쁘다고 서두르면서 일도 하고
원고도 쓰고 치부도 하고
시골에도 있고 해변가에도 있고
서울에도 있고 산보도 하고
영화관에도 가고
애교도 있다
그들은 말하자면 우리들의 곁에 있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
우리들의 전선은 당게르크도 놀만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
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
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
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
보이지는 않는다

-김수영, 「하······ 그림자가 없다」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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