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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다시『서편제』를 읽고 보다

by 장돌뱅이. 2020. 9. 11.


이청준의 소설 『서편제』와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를 다시 읽고 다시 봤다.
두 가지 모두 오래 전에 감상했던 터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여 몇몇 대목을 빼곤 마치 처음 접하는 것 같았다.

이제까지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대부분 경우 내게 소설이 주는 감동에 못미쳤다.
그러나 『서편제』의 경우 저울은 어느 쪽으로도 기울지 않았다.
소설은 소설대로 영화는 영화대로 메시지 전달 방식이 다를 뿐 감동의 묵직함 같았다.  
원작자 이청준이 말했듯 소설과 영화는 제목만 같을 뿐 별개의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두 가지 『서편제』와 함께 하는 동안 등장 인물들의 굴곡진 과 남도의 서정에 깊이 빠져들 수 있었다.
특히 영화는 남도 판소리의 구성진 가락과 그에 어울린 정제된 영상이 애잔함과 황홀함을 동시에 안겨주었다.
다만 소설과 영화 속에서 말하는 한(恨)의 개념이 좀 모호하거나 작위적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한의 축적과 극복역사적이나 피부에 와닿는 현실적인 상황에서 이루어지기 보다는
다분히 관념의 테두리 안에서 맴돌고 있기 때문은 아닐끼 생각했다.
소설 속 문장과 작가의 말, 그리고 영화 한 장면을 인용해 본다. 

여자의 목청은 남정네들의 그 컬컬하고 장중스런 우조(羽調)뿐 아니라 여인네 특유의 맑고 고운
계면조(界面調
)풍도 겸하고 있어서, 때로는 바위처럼우람하고도 도저한 기백이 솟아오르는가 하면
때로는 낙화처럼 한스럽고 가을 서릿발처럼 섬뜩섬뜩한 귀기가 넘쳐 났다. 가파른 절벽을 넘고 나면
유장한 강물이 산야에 걸쳐 있고, 사나운 폭풍의 한밤이 지나고 나면
새소리 무르익는 꽃벌판의 한나절이 펼쳐졌다.
-소설집 『서편제「소리의 빛-


사람들은 흔히 남도소리를 한의 가락이라 말들 하지요. 하지만 그걸 좀더 옳게 말하자면 한풀이 가락이라고
말해야 할 거외다.
남도소리는 우리의 마음
속에 그 몹쓸 한을 쌓아가는 것이 아니라 , 거꾸로 그 한으로 굳어진
아픈 매듭들을 소리로 달래고
풀어내는 것이란 말이외다. 그래 그 한의 매듭이 깊은 사람들에겐 자기 소리로
그것을 풀어 내는
일 자체가 삶의 길이 되는 수도 있는 거지요.
-소설집 『서편제』 중 「다시 태어나는 말-


자기 삶의 본자리여야 할 고향을 잃게 된 아픔, 자기의 본 모습과 근본을 잃고 사는 아픔, 그래서 늘상 그것들을 되찾아 돌아가
자신의 본모습을 회복해 살고 싶은데도 그것을 용납해주지 않는 갖가지 현실적 난관과 장애들에 대한 원망과 아픔들
―.
그러나 우리는 그 아픔들이 우리 삶 속으로 융합되고 오래 삭여져 그 삶을 오히려 힘있게 지탱해주는 귀한 생명력으로
전환
수 있음을 보아 왔다. 그래 나는 종종
우리 삶의 높은 성취는 그 갖은 아픔을 품고 깊이 감내해 낸 과정 끝에서야
비로소 가능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될 때마저 없지 않다. 그러나 그러한 한의 본질은 흔히 말하듯 어떤 아픔이나
원망이 쌓여 가고 풀리는
상대적 감정태로서가 아니라, 그 아픔을 함께 껴안고 초극해 넘어서는 창조적 생명력의 미학으로
읽고 싶은 것이다.
 
-원작자 이청준-



*영화 『서편제』 중 "진도아리랑" 대목

소리의 길은 아득하기만 하고 당장의 생계조차 막막해진 절대 위기의 상항에 처하여 세 사람은
이제 더 내일의 삶을 기약하기가 어렵다.
그 위기는 피해 돌아갈 수도 없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다.
그렇다고 거기서 그냥 주저앉아 버리면 이 일가의 삶은 그대로 파탄이다.

그래도 내일의 삶을 기약해 보려면 그 어려움과 아픔을 함께 껴안고 삭여 넘어가는
길밖에 다름 도리가 없다.
그래 세 사람은 짐짓
진도아리랑의 신명기와 흥을 빌려 그 어려움과 아픔을 허허히 껴안는다. 
그리하여 가냘프나마 주저앉으려는 기력을 다시 부추겨 올려
내일에의 힘든 삶의 길을 계속해 나간다.
 
-원작자 이청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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