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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2020년 8월의 식탁

by 장돌뱅이. 2020. 9. 2.


손자친구는 어린이집에서는 낮잠을 잘 잔다는데 집에서는
전혀 다르다.
"왜 잠을 안 자니?" 물어보면 간단히 대답한다.
"놀아야 하니까."
저녁 무렵이 되면 끄덕끄덕 졸다가도 그것으로 급속 충전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하마터면 잠들뻔 했다'고 정신을 차리는 것인지 벌떡 일어나 지친 기색없이 뛰어다닌다.
그러면서도 밤이 늦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일찍 자야 키가 쑥쑥 크는 거야."
아내가 식사 자리에서 교육을 시도했다.
손자친구는 이 말에 말없이 아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할머니는 다섯 살때 늦게 잤어?"
(아내는 키가 작다.)

딸아이도 거들었다.
"니가 늦게 자면 할아버지가 앞으로 (너를 보러) 늦게 오고 
일찍 자면 할아버지가 일찍 올 거야."
손자친구가 말했다.
"내가 늦게 자도 할아버지는 내가 보고 싶어서 일찍 올 거야."

큰집 제사에 다녀온 뒤 손자친구가 물었다.
"제사가 뭐야?"
"사람이 나이를 많이 먹으면 하늘로 올라가거든. 
제사는 하늘에 계신 할아버지의 엄마, 아빠와 만나는 거야."
손자친구가 잠시 생각하다 물었다.
"할아버지는 나이가 많은데 왜 하늘나라에 안 가?"

손자친구는 돼지고기 보다는 소고기를 좋아한다.
버섯은 다른 것과 섞여도 기가 막히게 감지해내지고 나물은 종류를 가리지않고 고개를 끄덕인다.
호두는 뱉어내지만 땅콩엔 엄지척이다. 잼도 딸기 보다 땅콩을 찾는다.
울퉁불퉁 멋진 몸매의 토마토는 노래만 즐겨부르고 먹는 건 사과를 즐겨한다.

친구의 일부인 생활 습관과 생각, 그리고 식성을 알아가는 일은 사소하지만, 아니 사소해서 즐거운 성취다.   
3대가 둘러앉는 식탁을 위해
상상하고 '쪼개고 태우고 끓이는' 시간은 평화다.
식탁에 흐르는 자잘한 이야기로 음식과 맛은 완성되고 세월도 그렇다.


침묵을 쪼개지 않고
통째로 삼킬 수 있으면

사랑도 끓이지 않고 
싱싱할 때, 산 채로 냉동시킬 수 있으면 
그러면 우리는 행복해질까 
가끔씩 생각나면 꺼내어 
접시에 요리조리 담아도 보고 
보기만 해도 배가 부를 텐데 

심심하면 그리움의 식초를 치고 
조금씩 감질나게 음미하면, 붚부패할 염려도 없을 텐데 

쪼개고 태우고 끓이면서 
세월은 가고 우리도 가고 
사랑은 남을까 어쩔까

-최영미, 「가정 요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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