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콩나물

by 장돌뱅이. 2020. 9. 6.

아내가 쥐눈이콩으로 콩나물을 길렀다.
옛날처럼 시루가 있을 리 없으니 우유곽 밑바닥에 구멍을 내 사용했다.
그리고 까만 비닐 봉지를 씌워서 어두운 곳에 두었다가 하루에 몇 번씩 꺼내 물을 주었다.
밤중에도 잠에서 깨면 물을 주곤 했다. 콩나물의 용도 보다 키우는 일 자체를 
재미있어 하는 듯했다.
6일 정도 아내의 보살핌을 받은 콩나물은 우유곽 몸통이 빵빵해질 정도로 몸을 불렸다.
키도 쑥쑥 자라서 위쪽으로도 수북하게 노란 머리는 내밀며 올라왔다.
작은 콩의 변신은 가히 '천지개벽'의 수준이었다.

아내표 콩나물은 마트에서 사는 것만큼 통통하지 않고 늘씬(홀쭉)했다.
아내와 나는 그것을 건강한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무침과 북엇국의 맛도 더 나은 것 같았다.


콩에 햇빛을 주지 않아야 콩에서 콩나물이 나온다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긴 기간 동안
밑 빠진 어둠으로 된 집, 짚을 깐 시루 안에서
비를 맞으며 콩이 생각했을 어둠에 대하여
보자기 아래 감추어진 콩의 얼굴에 대하여
수분을 함유한 고온다습의 이마가 일그러지면서
하나씩 금빛으로 터져 나오는 노오란 쇠갈고리 모양의
콩나물 새싹,
그 아름다운 금빛 첫 싹이 왜 물음표를 닮았는지에 대하
금빛 물음표 같은 목을 갸웃 내밀고
금빛 물음표 같은 손목들을 위로위로 향하여
검은 보자기 천장을 조금 들어 올려보는
그 천지개벽

콩에서 콩나물로 가는 그 어두운 기간 동안
꼭 감은 내 눈 속에 꼭 감은 네 눈 속에
쑥쑥 한 시루의 음악의 보름달이 벅차게 빨리

검은 보자기 아래 ― 우리는 그렇게 뜨거운 사이였다

-김승희의 「콩나물의 물음표」-

'일상과 단상 > 내가 읽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다시『서편제』를 읽고 보다  (0) 2020.09.11
태풍이 지나간 뒤  (0) 2020.09.09
2020년 8월의 식탁  (0) 2020.09.02
풀과 나무와 사람들 사이의 별  (0) 2020.08.27
간결해서 특별한  (0) 2020.08.23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