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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차지고 말랑말랑하게

by 장돌뱅이. 2020. 8. 16.

유닌히 길었던 장마가 마침내 끝날 모양이다.
일기예보는 다음 주부터 낮에는 찜통 더위, 밤에는 열대야가 있을 것이라 전해준다.
요란스레 장마비 오던 날, 아내가 수제비를 해먹자고 했다.
밀가루를 물과 섞어 너무 질지도 되지도 않게 여러 번 치대서 반죽을 만들었다.
잘 만들어진 반죽은 손에 묻어나지 않고 감촉이 좋다.

멸치 육수를 우리고 호박과 감자, 그리고 미역과 오징어를 준비했다.
거기에 숙성시킨 반죽을 얇게 떼어 넣었다. 

아내와 따끈한
수제비를 이마를 맞대고 먹다보니 둘이서 차지고 말랑말랑하게 
한 세월을 보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냉장실 귀퉁이 
밀가루 반죽 한 덩이
저놈처럼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동그란 스텐그릇에
밀가루와 초면初面의 물을 섞고
내외하듯 등 돌린 두 놈의 살을 
오래도록 부비고 주무른다
우툴두툴하던 사지의 관절들 쫀득쫀득해진다
처음 역하던 생내와 
좀체 수그러들지 않던 빳빳한 오기도
하염없는 시간에 팍팍 치대다보면
우리 삶도 나름대로 차질어가겠지마는

서로 다른 것이 한 그릇 속에서
저처럼 몸 바꾸어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한미영, 「밀가루 반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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