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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사랑 '증명하기'

by 장돌뱅이. 2020. 8. 7.


*이중섭의 「부부」


한 사내가 증명서를 떼기 위해 동사무소에 갔다.
동사무소의 공무원은 신분증명서를 요구했다.
그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을 증명할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사내는 자신이 증명서의 본인이 맞다고 사정을 했다.
"급해서 그런데 한 번만 인정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공무원은 법 규정을 들어 요지부동이었다.
자신을 증명해 줄만한 것을 찾아 사내는 몸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다시 한 번 더 사정을 했고 공무원은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신의 몸과 지갑을 샅샅이 뒤지다가 
사내는 속주머니 깊은 곳에서 구겨진 자신의 증명사진을 발견했다.

사내는 그것을 공무원의 책상 위에 탕! 소리가 나도록 호기있게 내려 놓으며 소리쳤다.
"봐요. 내가 나 맞잖아요!"
"?????"

웃자는 이야기다.
그처럼 너무 당연한 일을 당연하지 않은 어떤 것으로 증명해야 할 때 답답하고 막막해지는 경우가 있다.
알리바이를 증명해줄 증인이나 증거가 없는 형사 사건의 혐의자처럼.

미국에 있을 적 아내가 내 아내임을 증명해야 했던 경우도 그와 비슷했다.
- https://jangdolbange.tistory.com/625

한창훈의 익살스럽고 훈훈한 단편 소설 「올 라인 네코」의 사랑 이야기도 그렇다.
육지에서 백킬로미터도 더 떨어진 섬마을 포구의 다방 레지인 이미정은 새벽에 여관문을 나서다가 공교롭게도 파출소장과 마주친다.
성매매특별법의 강력 시행, 특별단속 기간 중이라 파출소장은 이미 다방 종업원들을 차례로 불러 매매춘 방지를 위한 
'면담 경 교육, 교육 겸 훈시, 훈시 겸 내사, 내사 겸 취조, 취조 겸 인물감상'의 시간을 가진 터였다.  
파출소장은 이미정의 성매매를 확신하며 다그쳐대기 시작했다. 
이런저런 변명을 둘러대다가 옹색해진 미정은 마침내 '사랑'이었다고 고백한다.
 '경찰이 연애도 못하게 하느냐'하느냐며 대꾸를 해보지만 파출소장이 그 말을 믿을리 없다.
그러나 미정의 말은 사실이었다. 상대는 섬 토박이 뱃사람 노총각 용철오빠였다. 
그는 '나랑 삽시다' 하며 미정을 쫓아다녔다. 미정의 빚도 다 갚아주겠다고 했다.
처음에는 동네마다 하나씩은 꼭 있는 건달 정도로 생각하고 미정은 상대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용철이 '나랑 살잔께요'라는 말 대신 '외로운께 사랑하고 같이 안 외로웠으며 좋겠다'는 말을 
'학생들 암기과목 공부하듯 여객선 터미널에서, 싸롱 불빛 아래에서, 배 갑판 위에 물옷 입은 채서서, 
해수욕장 모래밭이 시작되는 곳에서, 노을 지는 방파제에서, 면사무소 골목 입구에서, 우체통 옆에서, 
파도 거칠게 올라오는 다리 나간에서' 거듭 되풀이하자 그 진심을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마침내 용철오빠가 현장에 소환된다.


"참 나, 말이 되는 소리를 해야지. 뭐, 성매매? 니기미. 미정씨, 갑시다."
"··· 내 입장에서는 자네와 저 아가씨는 특별법을 어긴 범죄자다 이 말이여. 
누구 맘대로 가. 갈테면 한번 가봐. 그 자리에서 바로 체포여."
(······)
"사랑해서 잤당께요."
"성매매로 잔 거여."
"아따 사랑이랑께 참말로. 진실한 사랑."
"그렇게는 안 보인다니께."
"나 돌아불겄네."    
"증거가 없잖어. 둘이 애인이라는 증거가."
"같이 잔 것이 증거요."
"그래 증거여. 그것이 성매매를 했다는 증거여. 어디 조서 한번 꾸며 봐?"
"돈 줬다는 증거가 읎잖소?"
"안 줬다는 증거도 없잖어."
"돈 안 줬다고 내가 말했잖소."
"피의자의 변명이 어디 증거가 돼야지."
"미치겄네. 그럼 어떻게 해야 내 말을 믿을라요."


소설 제목 '올 라인 네코'는 '배가 출항 할 때 닻이라든가 부두에 걸어놓은 밧줄이니 하는 것을 
모두 벗겨내라'는
뱃사람들의 은어라고 한다. 
사랑의 '출항'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조건과 구속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해방감을 준다.
그러나 사랑을 '증명'하는 항해는 '오래고도 가늘은 외길'이다.

'증명'이 아니라 완성이라는 말이 더 적절하겠지만.


오래고도 가늘은 외길이었다

어렵게, 어렵게 만나 자주
다투고 울고 화해하고 더러는
웃기도 하다가 이렇게 늙어버렸다

고맙습니다.

-나태주의 「부부 ·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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