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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나의 수타사

by 장돌뱅이. 2020. 7. 14.



공작산 수타사로 

물미나리나 보러 갈까 

패랭이꽃 보러 갈까

구죽죽 비는 오시는 날 

수타사 요사채 아랫목으로 

젖은 발이나 말리러 갈까 

들창 너머 먼 산이나 종일 보러 갈까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비 오시는 날 

늘어진 물푸레 곁에서 함박꽃이나 한참 보다가 

늙은 부처님께 절도 두어 자리 해바치고 

심심하면 

그래도 심심하면 

없는 작은 며느리라도 불러 민화투나 칠까 

수타사 공양주한테, 네기럴 

누룽지나 한 덩어리 얻어먹으러 갈까 

긴 긴 장마

-김사인, 「장마」-


수타사는 강원도 홍천에 있다.
공작산 아래 수타계곡의 깊은 곳에 위치한 조용한 절이다.
아내가 결혼 전 근무하던 학교가 그곳에서 멀지 않다.
그래서인지 난 수타사 하면 그 시절의 아내를 떠올린다.
어제 저녁엔 지난 앨범에서 교정 화단에 선 앳된 모습의 아내를 보았다.
"이때 한없이 나긋나긋던 애인이 지금은 이렇게 뻐들뻐들한 조강지처가 되었다니······."
내가 푸념을 과장하자 아내가 바로 대꾸를 했다.
"그게 다 장돌뱅이 바로 당신 때문이야!"

시 속의 수타사가 물론 반드시 그 수타사일 필요는 없겠다.
은일의 한적함과 여유로움, 때로는 무료하기까지 한 적막함. 그러면서도 작고 하찮은 일들이 주는 
소박하고 내밀한 즐거움이 있는 곳이면
다 수타사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아내에게 이 시를 읽어주며 백수가 지녀야 할 내공이자 모범이라고 낄낄거렸다.
들창 너머 먼 산을 종일 본다는 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므로.


밤새 요란스레 장마비가 내린 아침, 어린이집을 가는 손자친구의 전화를 받았다.
숫자에 관심이 많은 친구가 직접 번호를 눌렀다고 한다.
기운차고 낭랑한 목소리. 

손자는 가위바위보 놀이를 좋아한다.
가위바위보를 손으로도 발로도 한다.
다리를 모으면 바위고 옆으로 벌리면 보, 앞뒤로 벌리면 가위가 된다.
같은 방법으로 드러누워서 가위바위보를 할 때도 있다.
요즈음은 영어로 가르쳐달라고 해서 "락(ROCK), 페이퍼(PAPER), 시져스(SCISSORS)!"라고 외치기도 한다.
 

어린이집에 손자친구의 여친이 있다. 둘이서 애틋한 단짝이다. 
일찍 등교하는 사람이 앨리베이터 앞에서 나중에 오는 사람을 서로 기다려주기까지 한다.   

어느 날 손자친구가 여친에 대한 불만을 말했다. 여친이 가위바위보를 하면 매번 이긴다는 것이다.
"어떻게 매번 이기지?" 
아내와 내가 묻자 손자친구가 불만가득한 어투로 말을 했다.
"나한테 뭐를 낼 거냐고 맨날 물어봐."
"그래? 그럼 다음엔 그건 반칙이라고 친절하게 말해주면 될 거야."
일주일 뒤 손자친구는 말했다.
"아직도 걔가 이겨."
"왜?"
"내가 반칙이라고 했더니 아니야 라고 크게 소릴 질렀어."
다시 일주일 쯤 뒤 손자친구가 근황을 전해주었다.
"이제는 비겨. 내가 미리 말하면 걔도 똑같은 걸 내기로 했거든."

아내와 옛 사진을 보는 시간이, 전화기를 통해 전해지는 손자친구의 유쾌함이,
그리고 손자친구와 여친의 밀당(?) 이야기가 다 수타사이다.
  
긴 긴 장마다.
커피잔을 들고 내다보는 창밖 하늘에 아직 우중충한 구름이 가득하다.
한 이틀 비가 내렸으니 오늘은 잠시 해가 나오기도 하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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