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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262

태풍이 지나간 뒤 긴 장마에 이어진 몇 차례 태풍이 지나고 하늘이 맑다. 모처럼의 햇살이 반가워 팔을 벌리고 받아보기도 했다. 얼굴에 와닿는 바람엔 어느샌가 가을이 스며있다. "내 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 아내와 산책을 나섰다. 매일 다니는 길이 바뀐 날씨 탓인지 새롭게 다가왔다. 이제 어떤 것은 스러지고 또 어떤 것은 열매를 맺을 것이다. 아니 열매를 맺으며 스러지거나 스러지는 것으로 열매를 대신할 것이다. 인내하며 견디지 않아도 되는 시간이 허락되기를 욕심내며 아내와 기도해 보았다. 먼 산이 한결 가까이 다가선다. 사물의 명암과 윤곽이 더욱 또렷해진다. 가을이다. 아 내 삶이 맞는 또 한 번의 가을! 허나 더욱 성글어지는 내 머리칼 더욱 엷어지는 내 그림자 해가 많이 짧아졌다. -김종길, 「가을」 - 2020. 9. 9.
콩나물 아내가 쥐눈이콩으로 콩나물을 길렀다. 옛날처럼 시루가 있을 리 없으니 우유곽 밑바닥에 구멍을 내 사용했다. 그리고 까만 비닐 봉지를 씌워서 어두운 곳에 두었다가 하루에 몇 번씩 꺼내 물을 주었다. 밤중에도 잠에서 깨면 물을 주곤 했다. 콩나물의 용도 보다 키우는 일 자체를 재미있어 하는 듯했다. 6일 정도 아내의 보살핌을 받은 콩나물은 우유곽 몸통이 빵빵해질 정도로 몸을 불렸다. 키도 쑥쑥 자라서 위쪽으로도 수북하게 노란 머리는 내밀며 올라왔다. 작은 콩의 변신은 가히 '천지개벽'의 수준이었다. 아내표 콩나물은 마트에서 사는 것만큼 통통하지 않고 늘씬(홀쭉)했다. 아내와 나는 그것을 건강한 표시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런지 무침과 북엇국의 맛도 더 나은 것 같았다. 콩에 햇빛을 주지 않아야 콩에서 콩나물.. 2020. 9. 6.
2020년 8월의 식탁 손자친구는 어린이집에서는 낮잠을 잘 잔다는데 집에서는 전혀 다르다. "왜 잠을 안 자니?" 물어보면 간단히 대답한다. "놀아야 하니까." 저녁 무렵이 되면 끄덕끄덕 졸다가도 그것으로 급속 충전이 되는 것인지, 아니면 '하마터면 잠들뻔 했다'고 정신을 차리는 것인지 벌떡 일어나 지친 기색없이 뛰어다닌다. 그러면서도 밤이 늦어서야 잠자리에 든다. "일찍 자야 키가 쑥쑥 크는 거야." 아내가 식사 자리에서 교육을 시도했다. 손자친구는 이 말에 말없이 아내를 바라보다가 말했다. "할머니는 다섯 살때 늦게 잤어?" (아내는 키가 작다.) 딸아이도 거들었다. "니가 늦게 자면 할아버지가 앞으로 (너를 보러) 늦게 오고 일찍 자면 할아버지가 일찍 올 거야." 손자친구가 말했다. "내가 늦게 자도 할아버지는 내가 보고.. 2020. 9. 2.
풀과 나무와 사람들 사이의 별 언제부턴가 이런저런 약을 먹게 되었다. 영양제도 있고 치료(현상유지?)제도 있다. 일시적인 약도 있고 기약 없이 오래도록 규칙적으로 먹어야 하는 약도 있다. 병원도 자주 가게 된다. 아직 종합병원까지는 아니고 동네 병원 수준이지만 내과에 치과에 진료 부위가 다양하다. 50대까지는 좀처럼 없던 일이다. 병원에서 돌아올 때마다 약봉투를 선물처럼 받게 된다. "우리 나이에 약은 식후에 먹는 디져트 같은 거야" 술자리에서 서로 먹는 약을 확인하다 친구의 말에 웃은 적이 있다. 엇그제 외국인 이주노동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모임의 회원들과 영상으로 월례 회의를 했다. 회의 끝 무렵 누군가 나빠진 시력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자 비슷한 얘기들이 여기저기서 나왔다. 이미 백내장 수술을 받았다는 사람까지 있었다. 나도 .. 2020. 8. 27.
간결해서 특별한 보리밥 한 공기 반찬은 세 가지 김치와 된장과 상추. 먼저 상추쌈을 먹는다. 상추 한 잎에 보리밥 한 숟갈 김치 한 조각- 이래서 김치 맛, 상추 맛을 즐긴다. 다음은 보리밥 한 숟갈 떠먹고 된장 한 젓갈 찍어 먹는다. 구수한 된장 맛이 구수한 보리밥으로 다시 더없는 된장 맛이 된다. 이제 보리밥이 3분의 1쯤 남았다. 그러면 지금부터는 보리밥만으로 먹는다. 보리밥만 떠서 천천히 씹노라면 달고소한 보리밥 맛이 천하일품이다. 보리밥 한 공기로 세 가지 맛을 즐기는 이런 밥먹기는 내가 먹는 버릇이고 내가 깨달은 방법이고 내가 찾아낸 밥먹기다. 절대로 남에게 권하고 싶지 않다. 사람은 사람마다 입맛이 다르고 사람마다 버릇도 다르고 사람마다 생각이 다르니 저마다 먹고 싶은 대로 먹을 일이다. 다만 나는 김치를 .. 2020. 8. 23.
차지고 말랑말랑하게 유닌히 길었던 장마가 마침내 끝날 모양이다. 일기예보는 다음 주부터 낮에는 찜통 더위, 밤에는 열대야가 있을 것이라 전해준다. 요란스레 장마비 오던 날, 아내가 수제비를 해먹자고 했다. 밀가루를 물과 섞어 너무 질지도 되지도 않게 여러 번 치대서 반죽을 만들었다. 잘 만들어진 반죽은 손에 묻어나지 않고 감촉이 좋다. 멸치 육수를 우리고 호박과 감자, 그리고 미역과 오징어를 준비했다. 거기에 숙성시킨 반죽을 얇게 떼어 넣었다. 아내와 따끈한 수제비를 이마를 맞대고 먹다보니 둘이서 차지고 말랑말랑하게 한 세월을 보내는 일이 그렇게 어려울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냉장실 귀퉁이 밀가루 반죽 한 덩이 저놈처럼 말랑말랑하게 사는 게 어디 쉬운 일인가 동그란 스텐그릇에 밀가루와 초면初面의 물을 섞고 내외하듯 등 돌린.. 2020. 8. 16.
사랑 '증명하기' *이중섭의 「부부」 한 사내가 증명서를 떼기 위해 동사무소에 갔다. 동사무소의 공무원은 신분증명서를 요구했다. 그는 아차!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자신을 증명할 어떤 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사내는 자신이 증명서의 본인이 맞다고 사정을 했다. "급해서 그런데 한 번만 인정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그러나 공무원은 법 규정을 들어 요지부동이었다. 자신을 증명해 줄만한 것을 찾아 사내는 몸 구석구석을 뒤졌지만 어떤 것도 나오지 않았다. 사내는 다시 한 번 더 사정을 했고 공무원은 정중하게 거절을 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자신의 몸과 지갑을 샅샅이 뒤지다가 사내는 속주머니 깊은 곳에서 구겨진 자신의 증명사진을 발견했다. 사내는 그것을 공무원의 책상 위에 탕! 소리가 나도록 호기있게 내려 .. 2020. 8. 7.
콩, 덕분에 잘 놀고 잘 먹었다 서울 인근으로 귀촌을 한 누님은 수 년 째 농사를 짓고 있다. 귀촌 전까지 농사와는 전혀 상관없이 살아왔음에도 누나는 특유의 열정으로 다양한 품목을 능숙하게 키우고 있다. 규모도 만만치 않다. 밭농사뿐이지만 가히 영농후계자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다. 덕분에 가끔씩 누나가 손수 지은 이런저런 농산물을 받게 된다. 이번에는 호랑이강낭콩이었다. 나는 콩 반 쌀 반을 넣고 지은 밥, 아니 콩이 더 많아도 좋아할 정도라 서둘러 콩을 깠다. 그 중 일부는 손자친구를 위해 까지 않은 채로 남겨두었다. 아이들에겐 로보카 폴리나 타요버스만이 아니라 모든 게 놀잇감이 된다. 기대했던 대로 친구는 신이 나서 콩을 깠다. 콩밥도 자신이 직접 손으로 만졌다는 재미와 자부심이 더해져서인지 잘 먹었다. 콩아, 덕분에 잘 놀고 .. 2020. 7. 29.
다시 노노스쿨에 가다 고령화 사회로 진입한 우리 사회에는 여기저기서 실버세대를 겨냥한 유·무료의 교육이 다양하게 열리고 있다. 작년 노노(NO老)스쿨에서 음식과 식문화 전반에 관한 실기와 지식을 배웠다. 은퇴 후 받은 교육 중 이곳이 내겐 최고였다. 훌륭한 시설과 강사진, 그리고 짜임새 있는 커리큘럼을 볼 때 단연 그랬다. 은퇴하는 친구들에게 '백수의 앞치마는 세계평화를 부른다'고 주장해 왔던 터라 '세계 평화'(?)의 수준을 높이기 위해 나름 열심히 음식 공부에 매달렸던 시간이기도 했다. 졸업 후 처음으로 노노스쿨에 갔다. 졸업생과 올 교육생들이 만나는 날이었다. 복날을 맞아 1년 시차의 선후배가 함께 인근 지역에 홀로 사는 어르신들을 위해 음식을 나누어주기 위함이었다. 조별로 나누어 흑미 삼계탕과 부추무침 등을 만들어 도.. 2020. 7.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