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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그런 사람들

by 장돌뱅이. 2021. 3. 1.

신학청의 그림 「모내기」 1987


층층의 바위 절벽이

십리 해안을 돌아나가고
칠산바다 파도쳐 일렁이는
채석강 너럭바위 위에서
칠십 육년 전 이곳에 앉아 술잔을 기울이던
해산 전수용을 생각한다

산낙지 한마리에 소주를 비우며
생사로서 있고 없는 것도 아니요
성패로써 더하고 덜하는 것도 아니라던
당신의 자명했던 의리와
여기를 떠난 몇 달 후
꽃잎으로 스러진
당신의 단호했던 목숨을 생각한다

너무도 자명했기에 더욱 단호했던
당신의 싸움은
망해버린 국가에 대한 만가였던가
아니면 미래의 나라에 대한 예언이었던가
예언으로 가는 길은 문득 끊겨
험한 절벽을 이루고
당신의 의리도 결국 바닷속에
깊숙이 잠기고 말았던가

납탄과 천보총 몇 자루에 의지해
이곳 저곳을 끈질긴 게릴라로 떠돌다가
우연히 뱃길로 들른 당신의 의병 부대가 
잠시 그 아름다움에 취했던
비단 무늬 채석강 바위 위에서
웅얼거리는 거친 파도 소리 듣는다. 

- 최두석, 「채석강」-


인간이 처음 문자를 만들면서 한 일은 곡물 수확량을 조사한 세금 장부라고 한다.
국가는 사람들의 피땀을 세금이란 합법의 이름으로 거두어 부자에게 몰아주는
조직된 강도라는 말도 들은 적 있다.
지나간 역사를 돌이켜보면 그 말이 전혀 터무니 없지는 않은 것 같다.

온갖 가렴주구에 못 견딘 백성이 자식을 낳지 않겠다고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애절양(哀絶陽)」이란 끔찍한 시가 전해오지 않던가.

국가는 가장 냉혹한 괴물들 가운데서 가장 냉혹하다. 그 괴물은 차갑게 거짓말한다.
그 괴물의 입에서는 "나, 즉 국가는 민족이다." 라는 거짓말이 기어나온다.
-니체,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중에서-

그런데 그런 국가의 명운이 기울어갈 때 분연히 떨쳐 일어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것도 국가에서 받은 것이라곤 '입대 영장과 세금고지서 밖에 없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은 늘 놀랍다. 
해산 전수용(1879∼1910)은 전북 임실에서 태어나 1908년 의병을 일으켜 일제에 항거하다
체포되어 교수형으로 처형된 사람이다. 그에게 국가는 무엇이었을까?
다소 생뚱맞게 그런 질문을 떠올린 건 아마 오늘이 삼일절이기 때문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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