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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춘분

by 장돌뱅이. 2021. 3. 21.


지난 금요일 모처럼 미세먼지도 사라지고 기온도 푸근해서 손자친구와 밖에서 오래 놀 수 있었다.

자전거를 타고 킥보드를 타고 아파트에서 멀리 나가보았다.
놀이터에서 술래잡기도 하고  아이들틈에 섞여 미끄럼틀을 타보기도 했다.
그네를 타던 친구가 자기 신발을 벗어 옆 그네에 올려달라고 했다.
주위 아이들이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내 발을 보호해주는 신발도 그네 태워주는거야 "
친구의 말에 아이들과 함께 나도 킥킥 웃었다.

"이제 정말 봄이 온 것 같다!"
내가 말하자 친구가 고개를 흔들었다.

"아니야. 진짜 봄은 20일부터야."
유치원 선생님이 그렇게 가르쳐주었단다.
3월 20일? 뭐지? 잠깐 생각해 보니 춘분이었다.
절기 상으로는 한 달 전에 입춘이 지났지만  춘분이 가까워서야 날이 풀린다는 게 
선생님의 의도였던 것 같다. 


'진짜' 봄이 온 춘분, 아침부터 가만가만 비가 내렸다.

며칠 전 산책길에 본 꽃봉오리들이 피어났을 것 같아 아내와 우산을 들고 집을 나섰다.
개나리와 산수유가 만개해 있었다.
우산을 톡톡톡 두드리던 빗소리는 집이 가까워오면서 점점 커졌다.

 
봄이 시작되면
나는 대지에 구멍을 팝니다.
겨울 동안 모아온 것들을 넣습니다.
종이 뭉치들, 다시 읽고 싶지 않은 페이지들,
쓸모없는 단어들, 파편들,
실수들을 넣습니다.
헛간에 있던 것들도
그 안에 넣습니다.
햇빛과 땅의 기운,
지나온 여정의 흔적들을.

하늘과 바람에게, 그리고
충직한 나무들에게 나는 고백합니다,
나의 죄들을.
나에게 주어진 행운을 생각하면
나는 충분히 행복해하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은 소음을 들었습니다.
경이로움에 무관심하고
칭찬을 갈망하였습니다.

그런 후 나는
몸과 마음의 쓰레기들 위로 구멍을 덮었습니다.
어둠의 문을 닫으니,
죽음 없는 영원한 대지,
그 아래에서 낡은 것이 새것으로 피어납니다.

-웬델베리, 「정화」-


새 것들이 피어나는 진짜 봄부터는

내게 주어진 행운들을 좀 더 자주 돌아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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