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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소파에서 잠든 아내

by 장돌뱅이. 2021. 3. 25.

「화장대, 혹은 거울」, 1908
「노란 옷을 입은 여자와 개』, 1947년 이전


후기 인상파 화가 피에르 보나르 (Pierre Bonnard, 1867 ~ 1947)는 자유로운 색채와

독특한 선의 사용으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는 아름다운 풍경화, 정물화, 실내화를 많이 그렸다.
특히 여성 누드를 여러 점 그렸는데 모델은 부인인 마르트(Marthe)였다.
마르트는 사람들과 만나기를 꺼려하고 개와 고양이와 함께 집안에서만 지내는 독특한 여자였다.
외출할 때는 양산으로 가리고 다닐 정도였다고 한다.
마르트는 질투심이 많고 손님이 있어도 개의치 않고 욕실에 들어가는 괴팍함도 있었다.
보나르는 그런 아내를 매우 사랑하여 그녀가 지내기에 편한 집을 구했고 목욕탕을 꾸며 주었다.
그리고 마르테의 일상과 목욕하는 모습을 자주 그림의 소재로 삼았다.
그는 평생 아내의 그림을 무려 384점이나 그렸다.

보나르는 아내의 몸을 특별히 아름답게 과장하여 그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몸은 구석구석 화가의 사랑을 받는 몸이다.
그 정직한 사랑을 물감에 섞어 바르며 화가는 말하는 것 같다.
나와 희로애락을 같이한 육체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몸이라고.
아름다움은 대상이 아니라, 그것을 바라보는 이의 따뜻한 마음속에 있는 것이라고."
(이주헌의 글)

가끔씩 소파에서 잠든 아내에게 담요를 덮어줄 때 찬찬히 아내의 얼굴을 내려다보면 애처로운 느낌이 든다.
아내만의 독특함과 자잘한 일상을 보나르처럼 너그럽게 인정해주지 못했다는 자책도 해본다.
 '그대의 순결스러움만이 아니라 그대가 지닌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상처와 먼지'까지도  
사랑하겠다던 오래전 젊은 날의 약속은 마구 찍어낸 부도 수표처럼 흩어져 버린 것 같다.  

아직 너무 늦지 않은 것이라 믿으며 내가 해야 할 일을 꼽아본다. 


 아내의 몸에 대한 신비가 사라지면서
 그 몸의 내력이 오히려 애틋하다

 그녀의 뒤척임과 치마 스적임과
 그릇 부시는 소리가
 먼 생을 스치는 것 같다

 얼굴과 가슴과 허벅지께를 쓰다듬으며
 그녀가,
 오래전에
 내 가슴께를 스적인 것이 만져진다

 그녀의 도두룩하게 파인
 속살 주름에는
 사람의 딸로 살아온 내력이 슬프다
 우리가 같이 살자고 한 것이
 언젠가

 -장철문, 「신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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