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야트막한 사랑의 하루

by 장돌뱅이. 2020. 12. 24.


*카스파어 다비트 프리드리히 (CASPER DAVID FRIEDRICH), 「겨울풍경」, 1911년경


사내는
먼길을 걸어왔나 보다. 
멀리 성당의 실루엣이 여명 속에서 어슴푸레 보이는 거로 보아  아마 밤을 새워 걸어왔는지도 모르겠다.
지치고 힘들어 한 걸음도 더 디딜 수 없었는지 차가운 눈밭 위 바위에 등을 기대고 앉아 있다.
목발인 것도 같고 지팡인 것도 같은, 그가 걸으며 의지했을 나무 막대기조차 함부로 눈 위에 던져놓은 채로.

자세히 보면 사내는 두 손을 가슴에 모으고 기도를 올리고 있다.
초록의 전나무 앞에 십자가도 보인다.
무슨 이유로 여기까지 왔으며 어떤 간절함으로 기도를 하는 것일까?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어서 해가 떠올라 사내를 따뜻한 기운으로 감싸주었으면 싶다.

삶은 원래 견디는 것이라지만 전례 없는 유난함으로 고달픈 한 해였다.
그림 속 사내처럼 캄캄한 밤길을 지치도록 걸어온 느낌이다.
하루만이라도 내게 긴요하다고 생각하는 것들을 뒷전으로 물려야겠다.
그리고 또 한 해를 지탱하게 해 준 '야트막한 사랑' 하나씩 가슴두 손안에 모아 봐야겠다.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언덕 위의 사랑 아니라
태산준령 고매한 사랑 아니라
갸우듬한 어깨 서로의 키를 재며
경계도 없이 이웃하며 사는 사람들
웃음으로 넉넉한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매섭게 몰아치는 눈보라의 사랑 아니라
개운하게 쏟아지는 장대비사랑 아니라
야트막한 산등성이
여린 풀잎을 적시며 내리는 이슬비
온 마음을 휘감되 아무 것도 휘감은 적 없는

사랑 하나갖고 싶었네
이제 마를 대로 마른 뼈
그 옆에 갸우뚱 고개를 들고 선 참나리
꿀 좀 핧을까 기웃대는 일벌
한오큼 얻은 꿀로 얼굴 한번 훔치고
하늘로 날아가는

사랑 하나 갖고 싶었네
가슴이 뛸 만큼 다 뛰어서
둥어 한마리 등허리도 넘기도 힘들어
개펄로 에돌아
해 긴 포구를 잦아드는 밀물
마침내 한 바다를 이루는

-강형철, 「야트막한 사랑」-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