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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비 오는 하루

by 장돌뱅이. 2021. 4. 13.

비가 오는 날은  같은 음악과 커피를 듣거나 마셔도 맑은 날과는 느낌과 맛이 다르다.
혹은 보통 때와는 다른 분위기의 음악과 다른 맛의 커피를 찾기도 한다.
아내는 날이 우중충하면 평소에는 즐겨하지 않는  '달달이(케이크이나 쿠키)'를 궁금해 한다.

비 오는 날 특유의 눅진한 감촉과 낮은 채도와 명도의 풍경이 만드는 분위기에 사람의 감정도 젖어들기 때문일까? 집안에 머물기 힘들게 만드는 화창한 날씨만큼 부산해지는 마음을 다독이듯 가끔씩 내리는 비가 싫지 않은 이유다. 

근래에 들어 가끔씩 한 시간 정도 낮잠을 잔다. 젊은 날에는 없던 일이다.
딸아이 결혼 전까진 맑으면 맑은 날씨를, 비가 오면 비를, 심지어 태풍이 오면 태풍을 이유로 아내와 딸에게 나들이를 종용하곤 했었다. 기력이 떨어져서 그런 거 아니냐며 아내는 걱정을 하기도 하지만 좋은 쪽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60대 이후의 낮잠 10분은 밤잠 한 시간과 맞먹는다는 말도 있다.
하긴 졸리면 자는 것이지 (손자 친구와 어울리는 일이 아니라면 ) 졸음 참고 눈 부릅뜨고 해야 할 일이 있을 리 없는  백수지 않은가.


'주룩주룩 낙숫물 소리 / 낮잠을 방해할 것도 같은데 / 어째서 빗소리 들릴 땐 / 유독 잠이 달콤한 걸까?'
고려 시대 문인 이규보의 글이다.

아파트에서는 낙숫물 소리는커녕 웬만한 장대비가 아니면 소리만으로 비가 내리는 걸 가늠하기 쉽지 않다. 무심코 밖을 내다보다가 '어? 비가 오네?!' 하고 뒤늦게 깨닫기 일쑤다. 이규보처럼 잠을 재촉하는(?) 낙숫물 소리도 없는데 영화를 보다 잠이 들었다. 깨고나니 아내가 코까지 골며 곤히 자더라고 말해주었다. 50대 중반까진 친구들과 놀러가 '코파'와 '비코파'를 나누어 잠자리를 정할 때면 '비코파'에 속했는데 시나브로 시나브로 나도 '코파'가 된 것이다. 


비 오는 날의 음식으로 흔히 전(煎)을 꼽는다.
실제로 여름 장마철에 전을 만드는 재료의 소비와 전을 만드는 식당의 매출이 늘어난다는 통계가 있다.
과학적으로는 기온과 일조량이 낮아질수록 우리 몸이 세로토닌이라는 성분이 분비하기 위해 지방과
탄수화물을 찾게 되는데, 이 두 가지가 잘 조합된 음식이 전이라고 한다.
밀가루의 성분이 우울한 기분을 해소시켜주는 작용도 한다던가.

부추와 새우 오징어를 부침가루에 버무려 해물부추전을 만들었다.
양이 부족한 거 같아 별도로 애호박을 채 썰어 호박부침개도 만들었다.

전과 부침개 등의 뜻을 정확히 알기 위해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을 찾아보았다.

- 전(煎) : 생선이나 고기, 채소 따위를 얇게 썰거나 다져 양념을 한 뒤, 밀가루를 묻혀 기름에
                  지진 음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

- 전병(煎餠) : 찹쌀가루나 밀가루 따위를 둥글넓적하게 부친 음식을 통틀어 이르는 말.


- 저냐 : 한자 전에서 유래된 말로 얇게 저민 고기나 생선 따위에 밀가루를 묻히고 달걀 푼 것을 씌워
              기름에 지진 음식. 전유어(煎油魚)나 전유화(煎油花)도 같은 말이다.

- 부침개(부침) :  기름에 부쳐서 만드는 빈대떡, 저냐, 누름적, 전병(煎餠) 따위의 음식.

- 지짐이 : 국보다 국물을 적게 잡아 짭짤하게 끓인 음식 혹은 기름에 지진 음식물을 통틀어 이르는 말.

- 부꾸미 : 찹쌀가루, 밀가루, 수수 가루 따위를 반죽하여 둥글고 넓게 반죽하여 번철이나 프라이팬
                   따위에 지진 떡, 팥소를 넣고 반으로 접어서 붙이기도 한다

찾아 놓고 보니 더 헷갈린다.
재료의 형태를 살려서 기름에 부친 것은 전이고(호박전, 육전, 명태전), 다지거나 갈아서 다른 재료와 버무려 만들면 부침개라고(호박 부침개, 김치부침개) 구분하는 사람도 있지만
실용적으론 다 같은 의미의 단어라고 생각해도 되겠다. 게다가 빈대떡은 부침개인데 왜 빈대'떡'이라 부르는지 알수록 어렵다.
아무튼 전은 맛있고 아내가 좋아한다. 나는 그것만 기억하면 될 일이다.

사람들은 치킨과 맥주처럼 (비 오는 날의) 전과 막걸리의 궁합을 이야기한다.
전을 부쳐놓고 막걸리 생각이 떠올랐지만 빗속을 걸어 마트에 다녀올 정도는 아니어서  참고 말았다. 예전 같으면 태풍이 불어도 다녀왔을 것이다. 며칠 전 친구와 전화를 하다 술이 이젠 그다지 당기지 않는다고 했더니 녀석이 다그치듯 음성을 높였다.
"제길! 천하의 장돌뱅이도 나이 드니 어쩔 수 없나 보네!" 
"너는 어떤데?" 내가 되묻자 녀석이 의기양양 대꾸를 했다.
"나는 여전해. 나보고 술 끊으라면 죽으라는 얘기지." 
하지만 말술이었던 녀석이 이젠 소주 한 병에 혀가 꼬부라진다는 걸 우리는 서로 알고 있다.
낮잠과 코골이, 그리고 음주 습관의 변화가 나이를 실감하게 한다.


전의 기름진 맛을 커피로 달래며 송강 정철의 호기로운 권주가를 읽는 것으로 막걸리를 대신했다.


한 잔 먹세 그려, 또 한 잔 먹세 그려

꽃 꺾어 셈하면서 무진무진 먹세 그려
이 몸 죽은 후에
지게 위에 거적 덮어 졸라매어 지고 가나
화려한 꽃상여에 만인이 울며 가나
억새, 속새, 떡갈나무, 백양 속에 가기만 하면 누른 해, 흰 달, 가는 비, 굵은 눈, 쌀쌀한 바람 불 때
누가 한 잔 먹자 할꼬
하물며 무덤 위에 원숭이 휘파람 불 때 뉘우친들 무엇하리
- 송강 정철, 「장진주사(將進酒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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