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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당나귀 두 마리

by 장돌뱅이. 2021. 4. 9.


몇 해 전 세상을 잘 살고 있느냐를 검증하는(?) 농담 투의 질문이 있었다.
우리나라 중산층의 자격에 대한 풍자라고도 했다.
세상이 그다지 많이 변하지 않아서인지 요즘에도 질문과 풍자는 유효해 보인다.

- 아직도 소형차를 타십니까?
  (예, 정확히는 소형차조차도  가지고 있지 않습니다.
  지금 가끔씩 타는 차는 딸아이네 비상용 차를 빌려 타는 것입니다.)

-아직도 강북에 사십니까?
  (예, 태어나서 강북을 벗어난 적이 없습니다.)

-아직도 증권 시세를 모르십니까?
  (예, 시세는커녕 그걸 어떻게 하는지도 모릅니다.)

질문에 답하다 보니 난 잘 살아오지 못했고 중산층도 아닌 듯하다.
특별히 억울하지는 않다. 그런 세태는 나와 상관없다고 생각하며 살아온 아둔함을
아내와는 무슨 달관의 지혜였던 양 덤덤히 이야기할 때도 있다.

어쩌면 가질 수 없는 것들에 '저 포도는 시다'고 서둘러 체념했다는 표현이 정확하리라.

이제 직장에서도 물러났으니 여생에 신분 상승의 극적인 변화가 생길 리도 없겠다.

그나마 나이가 들어 다행스러운 점은 그런 체념의 기준과 경계가 점점 흐려진다는 것이다.
체념도 미련이 있어야 가능한 또 다른 욕심 아닐까?
능력 밖의 일에 대한 미련이 스러지면서 일상이 한결 자유롭고 편안해졌다.
그것이 또 다른 체념이라 해도 상관없는 일이다. 


대신 새롭게 보이는 것들이 살가워진다.
누군가는 '늘 보던 것들의 새로움'이라고 했다.

미세 먼지가 걷힌 푸른 하늘이라던가, 산뜻한 바람에 잘게 흔들리는 강물.
햇볕 따사로운 강변에 피었다 지는 꽃들 - 개나리와 벚꽃, 봄까치꽃 제비꽃, 민들레 ······.
그리고 함께 걷는 아내.

그러고 보니 보충 질문이 한 가지 더 있었다.

- 아직도 조강지처와 사십니까?
  (옛! 그렇습니닷! 앞으로도 그럴 것입니닷!)

입대 초기의 훈련병처럼 씩씩하게 목청껏 대답할 수 있는 유일한 질문이다.
당나귀 이야기가 바로 우리 이야기 같다며 아내가 웃는다.



어느 날 당나귀 한 마리가
부인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이렇게 멍청하고
당신도 멍청하니
우리 함께 죽으러 갑시다, 쿰!"

종종 그랬던 것처럼
둘은 즐겁게 살았다.

-  모르겐 슈테른, 「당나귀 두 마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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