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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47 - 김기택의「자전거 타는 사람 」

by 장돌뱅이. 2019. 10. 16.

타요버스를 비롯한 자동차와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공룡, 그리고 여름철 물놀이를 거쳐 요즈음 나의 절친 손자가 제일 좋아하는 놀이는 단연 자전거 타기이다.

여전히 그네나 미끄럼틀, 흔들그물도 좋아하지만 자전거를 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주변 아파트나 공원까지 활동범위를 넓혀 일종의 '놀이터 호핑 HOPPING'에 더 큰 매력을 느끼는 것 같다. 조금씩 다른 구조의 놀이터나 공원을 찾아 제법 먼 길을 가는 것도 개의치 않는다. 그런 날이면 평소와는 달리 대개 초저녁에 곯아떨어지곤 한다.

친구가 자전거를 타면 나는 마치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때 김정은을 호위하던 북측 경호원처럼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친구의 옆을 긴장해서 쫓아다녀야 한다. 느닷없이 방향을 바꾸어 차도로 향하는 위험한 장난을 즐기기 때문이다.

친구의 자전거 사랑을 보며 문득 나도 자전거를 다시 타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해 전인가 집안 대청소를 하면서 잘 쓰지 않는 물건들을 정리할 때 구석에 방치되어 있던 낡은 자전거를 과감히 처분한 뒤로는 뒤로는 자전거를 거의 타지 않았었다. 자전거 대신에 아내와 걷거나 혼자 달리는 것이 더 좋았기 때문이었다.

며칠 전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따릉이"를 이용하여 보았다.
자전거 타기 마니아용이 아닌 장보기 같은 일상생활형의 자전거지만 "따릉이"는 편리한 제도였다. 필요할 때 잠깐씩 이용할 수 있고 자전거를 빌리는 방법도 간단하거니와 이용료도 저렴했다.
일주일에 세 번 노노스쿨에 가려면 전철이나 버스를 환승하여 다녔는데 자전거로 가니 여유로웠다.
한강변의 풍경도 쾌적함을 더했다. 날이 추워지기 전까진 자주 이용할 생각이다.

은퇴 전까지 나는 미국 서부의 한 도시에서 8년 가까이 주재를 했다. 나의 경험으로 볼 때 미국은, 특히 서부 쪽의 대부분의 도시는 대중교통만을 기준으로 말하자면 세계에서 가장 후진적이었다.
전차와 버스가 있긴 했지만 거기에 맞춰 일상생활을 하는 배차 간격이 너무 컸다. 대중교통의 고사(枯死)가 차 판매를 늘리기 위한 자동차 회사의 의도적인 영업에 의한 결과라는 사실은 충격적이었다.

생활 패턴이 개인 차량 이동을 전제로 되어 있었다.
도시는 주거 공간과 상업공간이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음료수 한 캔을 사기 위해서 차고에서 차를 꺼내 몰(MALL)로 가야 했다.
구멍가게 옆에 세탁소, 그 옆에 제과점, 그 옆에 PC방, 그 옆에 약국, 그 옆에 카페, 그 옆에 통닭집 하는 식의 우리나라 아파트 앞의 혼재된 풍경과는 완전히 달랐다.
차가 없으면 친구의 집도 방문할 수 없고 직장도 학교도 갈 수 없었다.

적어도 미국 서부지역에서 자가용은 편리하고 안락한 사적인 공간을 확보하려는 선택적 교통수단이 아니라 그것 아니면 달리 일상생활을 영위할 수 없는 필수품이고 그런 만큼 강요된 수단이었다.
누군가 '미국에서 자동차는 우리가 외출할 때 신는 신발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고 했다. 맞는 말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들이 미국인들인 것이다.

미국에서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도 차의 시대에 살고 있다. 차 없이는 살 수 없다.
자동차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섬기면 산다는 말이 과장이 아니다.
차는 도로에서뿐만 아니라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생활 전반을 지배하는 일종의 ‘권력’이 되었다.
인구증가를 상회하는 자동차의 증가는 도로를 넓히고 직선화했다. 마을은 도로에 따라 '흥망성쇠'가 정해졌다. 물품의 운반이 용이해지면서 필요 이상의 소비가 가능해졌다. 이에 따라 대형마트가 탄생하고 소자본의 골목상권이 몰락했다.

마을뿐만 아니라 국토 전체가 차량의 신속한 이동을 전제로 계획되고 변모되었다. 먼 곳까지의 이동이 손쉬워지면서 휴식과 놀이의 형식과 내용이 바뀌었다. 사람들의 사고방식도 바뀌었다.
거대하고 빠른 것들만 존재의 이유를 획득했고 속도와 효율이 가치의 기준이 되었다.

하여 우리는 더 이상 차의 주인이 아니다. 도로의 주인도 아니다.
길을 건넌다는 이유만으로 야생의 생명들을 죽이는 "로드킬 ROADKILL"은 인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길 위에 서면 몸가짐을 조신하게 하고 차에게 길을 내주며 그에 대한 '예절'을 표해야 한다. 차를 만들고 길을 만든 건 사람들이었지만 길 위에서 사람들은 다만 '자유로운 교통을 방해하는 가장 큰 방해물'이 될 뿐이다.

도로는 넓어지고 마을과 마을의 체감 거리는 가까워졌지만 사람들의 생활공간은 갈라지고 좁아졌다.
이동은 빈번하지만 지역 간의 소통과 교감은 비례하여 활발해지지 않았다.
관계와 교감이 단절되었을 때 인간은 왜소해진다.
‘지옥이란 이 세상 모든 관계들이 끊어지는 삶’이라고 어느 시인이 말했다.

물론 내가 자동차와 결별한 것은 그런 거창한 사회적·철학적 의미에 바탕을 두고 있지는 않다.
반드시 자동차와 함께 다녀야 하는 미국 생활이 지겨웠기 때문이고 서울로 돌아와서는 언제 어디서나 걸핏하면 만나는 교통체증에 견디기 힘들도록 지루해진 것이 이유였다.

미국에 비해 서울은 대중교통의 천국이다. 지하철과 버스의 환승 연결망이 촘촘하다. 서울과 수도권 전 지역을 연결하는 교통망이 체계적이어서 대중교통만으로 어떤 일상생활도 해낼 수 있다. 굳이 미국 사람들처럼 큰 '신발'을 신고 도로를 점점 더 좁게 만드는데 기여할 필요가 없다.

차 한 가지를 포기하고 나자 많은 선택이 내게 주어졌다.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BMW’라고 했다.
‘Bicycle, Metro & Walk’의 첫 자를 딴 것이다. 즉 자전거와 대중교통 그리고 걷기를 의미한다.
‘BMW’ 덕분에 한식 요리를 배우러 다니는 등하교 길이 편안하고 느긋해졌다.
오고 가며 며칠 만에 시집 한 권을 읽을 수 있는 시간이 생겨났다.
계단 오르내리기로 얻는 운동은 덤이었다.
드디어 이번에 "따릉이"로 'BMW'의 완성을(?) 보았다.

소설가 김훈은 자신의 자전거에 "풍륜"이란 이름을 붙이고 『자전거 여행』을 다녔다.
김기택의 시는 그의 자전거에게 붙여졌지만, "따릉이"에게도 붙여진 것이고, 자전거를 타는 모든 사람에게도 붙여졌을 것이다. 자전거를 타면 누구나 둥글게 굴러가기 마련이므로. 

당신의 다리는 둥글게 굴러간다
허리에서 엉덩이로 무릎으로 발로 페달로 바퀴로
길게 이어진 다리가 굴러간다
당신이 힘껏 페달을 밟을 때마다
넓적다리와 장딴지에 바퀴 무늬 같은 근육이 돋는다
장딴지의 굵은 핏줄이 바퀴 속으로 들어간다
근육은 바퀴 표면에도 울퉁불퉁 돋아 있다
자전거가 지나간 길 위에 근육 무늬가 찍힌다
둥근 바퀴의 발바닥이 흙과 돌을 밟을 때마다
당신은 온몸이 심하게 흔들린다
비포장도로처럼 울퉁불퉁한 바람이
당신의 머리칼을 마구 흔들어 헝클어뜨린다
당신의 자전거는 피의 에너지로 굴러간다
무수한 땀구멍들이 벌어졌다 오므라들며 숨쉬는 연료
뜨거워지는 연료 땀 솟구치는 연료
그래서 진한 땀 냄새가 확 풍기는 연료
당신의 2기통 콧구멍으로 내뿜는 무공해 배기가스는
금방 맑은 바람이 되어 흩어진다
달달달달 굴러가는 둥근 다리 둥근 발
둥근 속도 위에서 피스톤처럼 힘차게 들썩거리는
둥근 두 엉덩이와 둥근 대가리
그 사이에서 더 가파르게 휘어지는 당신의 등뼈

- 김기택의 시, 「자전거 타는 사람 -김훈의 자전거를 위하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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