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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34 - 유하의「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by 장돌뱅이. 2019. 8. 19.




바람부는 날이면 압구정동에 가야 한다 2

            ― 욕망의 통조림 또는 묘지

 압구정동은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이다
 국화빵 기계다 지하철 자동 개찰구다 어디 한번 그 투입구에 
 당신을 넣어보라 당신의 와꾸를 디밀어보라 예컨대 나를 포함한 소설가 박상우나
 시인 함민복 같은 와꾸로는 당장은 곤란하다 넣자마자 띠― 소리와 함께
 거부반응을 일으킨다 그 투입구에 와꾸를 맞추고 싶으면 우선 일 년간 하루 십킬로의
 로드웍과 새도 복싱 등의 피눈물 나는 하드 트레이닝으로 실버스타 스탤론이나
 리차드 기어 같은 샤프한 이미지를 만들 것 일단 기본 자세가 갖추어지면
 세 겹 주름바지와, 니트, 주윤발 코트, 장군의 아들 중절모, 목걸이 등의 의류 액세서리 등을
구비할 것 그 다음

 미장원과 강력 무쓰를 이용한 소방차나 맥가이버 헤어스타일로 무장할 것
 그걸로 끝나냐? 천만에, 스쿠프나 액셀 GLSi의 핸들을 잡아야 그때 화룡점정이 이루어진다
 그 국화빵 통과 제의를 거쳐야만 비로소 압구정동 통조림통 속으로 풍덩 편입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곳 어디를 둘러보라 차림새의 빈부 격차가 있는지 압구정동 현대아파트는 욕망의 평등 사회이다
패션의 사회주의 낙원이다

 가는 곳마다 모델 탤런트 아니 사람 없고 가는 곳마다 술과 고기가 넘쳐나니 무릉도원이 따로 없구나
미국서 똥구루마 끌다 온

놈들도 여기선 재미 많이 보는 재미 동포라 지화자, 봄날은 간다―
 해서, 세속도시의 즐거움에 동참하고 싶은 자들 압구정동의 좁은 눈으로 들어가길 힘쓰는구나
 투입구의 좁은 문으로 몸을 막 우겨넣는구나 글쟁이들과 관능적으로 쫙 빠진 무용수들과의 심리적 거리는,
인사동과 압구정동과의
실제 거리에 비례한다
 걸어가면 만날 수 있다 오, 욕망과 유혹의 삼투압이여
자, 오관으로 느껴보라, 안락하게 푹 절여진 만화방창 각종 쾌락의 묘지, 체제의 꽁치 통조림 공장,
그 거대한 피스톤이, 톱니바퀴가
검은 기름의 몸체를 번득이며 손짓하는 현장을
 왕성하게 숨막히게 숨가쁘게
 그러나 갈수록 쎅시하게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분다 이곳에 오라
바람이 불지 않는다 그래도 이곳에 오라


한때 압구정동은 우리나라 소비문화의 아이콘이었다.
강남 개발 덕분에 갑작스레 부자가 된 부모를 둔 젊은 '오렌지족'들이 값비싼 외제차를 몰고
'야 타!'를 외치며 '로데오거리'를 달리던 시절이었다.
'바람이 불어도 바람이 불지 않아도' 압구정은 모여드는 젊은이들로 북적였다.  
그 시절 모든 유행 문화는 압구정에서 시작되었다. 미국 베버리힐스의 로데오거리(Rodeo Drive)가 
뜬금없게도 압구정에 자리를 잡더니 곧이어 서울은 물론이고 지방까지 수십 곳에 같은 이름의 거리를 만들어냈다.

그 때문에 로데오거리는 이제 더 이상 고급스런 '명품' 거리의 상징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렸다.
의류 아울렛이나 오밀조밀 늘어선 식당 거리 같은 '저렴한' 이미지를 떠올리게 될 뿐이다.
그와 더불어 압구정의 의미도 시들해졌다. 자생의 주체적 문화가 아니라 서양 문화의 겉모습에 대한
막연한 동경과 내적 열등감에서 시작된 '소란'의 자연스런 결말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체제가 만들어낸 욕망의 통조림 공장"은 압구정과 함께 스러진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복제와 확산을 거듭하여 전국화 되었다. 
타인에 대한 비교우위에 서려는 욕망은 우리 사회에 이제 평준화 되고 일상화 되었다.
미국인 문화비평가 스콧 버거슨은 "북한이 조지오웰의 소설 『1984년』처럼 공포에 의해 지배되는 곳이라면
남한은 헉슬리의 『멋진 신셰계』처럼 욕망에 의해 지배되는 사회"라고 했다.
                                                 

여름에 압구정동에 왔으니 좋아하는 건진국수를 거를 수 없다.
압구정동에 오면 국수도 명품이 된다고 했던가. 명품이 아니면 압구정동에 올 수 없다고 했던가.
그 말을 믿어본 적은 없지만 좋아하는 건진국수라 아내와 맛있게 먹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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