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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33 - 심호택의「방학숙제」

by 장돌뱅이. 2019. 8. 16.




동무들과 망둥어 낚으러 오가는 길

어느 날 벼포기 알 배고 논두렁콩 매달리면서
들판 건너 하늘 훤하게 떠오르면
여름도 그만이다
개학 날짜 다가오는 것 웬수 같아라
밀려 나자빠진 방학숙제
학교 가기 하루 전날
그날도 저녁먹고 나서야 주섬주섬 챙기는데
일기 쓰기 제일로 골치아퍼라
한달 것 한나절에 지어내기도 막막하거니와
그증에서도 고약한 일은
찌푸렸다 갰다 그날 그날 날씨 모르겠는 것
가물거리는 등잔불 아래
모기 뜯기며 고민하는 모양 안되었던지
동네 마실꾼까지 거들고 나서는데
한달 전 그때 비왔느니라
무슨 소리냐 땡볕에 까치란 놈 대가리 깨지겠더라
아니여 아니여 비가 오락가락했느니라
밤은 깊어가고 졸음은 쏟아지고
제기랄 것 누구 말을 들어야 하나


노노스쿨의 개학이 사흘 앞으로 다가왔다.
방학이라서 좋고 개학이라서 좋은 건 나 같은 백수만이 가능한 경지(?)일까?

개학이 다가올수록 하지 못한 숙제가 은근히 캥겨오면서도 노는 관성을 어쩌지 못 하다가
개학 하루 이틀 전이 되어서야 몰아치기로 숙제를 하느라 부산해지곤 했던 어린 시절의 방학.
오로지 한 가지 확실하게 한 숙제는 방학 초기에 색연필까지 칠해가며 만들었던 생활계획표뿐이었다.
물론 계획은 계획일뿐 실천은 작심삼일도 아닌 작심무일이 되기 일수였지만.
 
일기쯤이야 '친구랑 놀았다. 참 재미있었다.', '마을 뒷산 에서 놀았다 참 재미있었다.' 등으로
'놀았다'와 '참 재미있었다' 시리즈로 반복해서 고, 날씨도 위 시 속의 주인공처럼 골치 썩을 필요없이
과감하게 맑음과 흐림 혹은 비를 내키는 대로 적고 선생님의 눈이 비켜가기를 바라면 되지만,
내게 결코 벼락치기로는 할 수 없었던 골치 아픈 숙제 식물채집이었다.
방학 초에 틈 나는 대로 해서 채집해서 두꺼운 책갈피나 신문지 사이에 끼워 눌러놓아야 물기가 마르고
납작해져서 투명테이프로 스케치북에 붙일 수 있는 법인데, 하루 전에 급조로 만들어서는
도저히 그 모양새를 만들어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은퇴란 방학이나 개학처럼 시간이 더 이상 구분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제 시간은 날마다 예정된 형태가 아니라 아무 것도 쓰여지지 않은 백지장으로 주어진다. 
그것이 단조로움과 권태로움의 수렁이냐 아니면 가볍고 자유로운 날개냐 하는 것은
오로지 나의 의지에 달려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 끝내지 못한 생의 '숙제'에 어린시절처럼 상심하거나 벼락치기로 서두지는 않으려 한다.
산책길 저문 강물을 바라보듯 그저 흐르는 시간 속에 때늦은 미련을 담담히 풀어 보내고 싶다.
생에 이루어질 어떤 '숙제'라면 벌써 이루어졌지 않겠는가.
자족(自足)은 자만과 다르고 때론 포기도 지혜가 되는 법이다. 
누가 그랬다. 이젠 살아온 날들을 지우며 살 나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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