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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사는 거이 다 똑같디요"

by 장돌뱅이. 2018. 8. 11.

전시회나 박물관 관람은 유별난 더운 올 여름에 여가를 보내기에 현명한 선택이 될 수 있다.
사진작가 임종진이 북녘 사람들의 일상을 담은 사진전 "사는 거이 다 똑같디요"가 서촌의 갤러리 류가헌에서 열리고 있다.

먼 유럽 사람들의 일상이 아니라 서울에서 지척인 거리에 사는 동족이 일상이,
그것도 우리와 다른 것이 아니라 똑같은 일상이 호기심을 끌고 신기하게 느껴지는 것은
그동안의 남북의 비극적인 관계가 우리의 의식과 정서를 왜곡시켰다는 반증일 것이다.

전시회장에 걸린 작가의 <작업 노트>가 사진만큼이나 인상적이었다.
아내와 함께 사진 감상을 마칠 무렵 KBS라디오와 생각지도 않은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아래 사진은 전시회 사진의 일부이다.   


<작업 노트>

 

다시 돌이켜 생각하면 절로 미소가 흐른다.
지금 이 땅 아래위로 번지는 평화와 상생의 바람에 기대어 진득하게 깊은 숨을 내쉬어 본다.
호흡이 제법 가뿐하다. 다시 들뜨는 기분은 말할 나위 없이 참 좋다. 모처럼 뜨겁게 달아오르는 기운을 뚫고
세월 저편으로 보내야했던 기억의 조각들을 모아 세상에 전한다. 하릴없이 묻어둔 채 그대로 잊히리라 싶던
조각들이 뚜렷한 형상이 되어 뭉근하게 되살아 난다. 파편화된 기억들은 금세 제 모습을 갖추었다. 기억의
주체는 내가 아닌 그들, 1998년 가을에 시작되어 2003년까지 모두 여섯 차례에 걸쳐 북녘 땅 여기저기를 돌며
낯을 익힌 사람들. 바로 북녘 땅 우리의 또 다른 얼굴들이다. 세월과 먼지에 묻힌 필름들을 모두 꺼내어 살피는 지금,

'사람인' 그들과 나눈 모든 기억들이 되살아나면서 다시 이 걸음을 잇고 싶다는 생각이 온전히 가슴을 뛰게 만든다.
알사탕 하나를 입에 물고 있는 듯 성큼 달달해진다.


20년 전 그 해 가을빛은 아주 청명하고 아늑했다.
같은 하늘 아래 다른 삶을 처음으로 접하게 된 그날 역시 그랬다. 베이징을 거쳐 평양 순안공항에 내리던
1998년 11월 28일 정오. 그 따사롭던 가을햇살이 설렘과 두려움에 요동치는 내 가슴을 부드럽게 다독여주었다.
고려민항 비행기에서 내려 처음 그 땅에 발을 딛는 순간 잠시 꿈인가 싶기까지 했지만, 내내 품고 있던 두려움이
알 수 없는 이유로 걷히는 것을 느끼며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여러 감정들이 뒤엉켰다. 일부러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한가득한 공기가 가슴을 채우며 이내 편안해졌다.


전날 아침 서울을 출발해 불과 하루 지나 도착한 땅 평양.
실제 거리보다는 가슴의 거리가 수백 배는 더 멀었을 그 땅 위에 직접 선 느낌은 스스로 놀랄 만큼 부드러웠다.
처음 방문인 것은 물론 보이는 모든 것들이 낯설어야 할 자리에서 마치 잘 아는 동네를 다시 방문한 듯 묘하게
출렁거리는 기시감이 반가웠다. 살아가는 방식 자체가 완벽히 갈라져 있는, 또 다른 반쪽의 땅 한복판에 처음
서서 섣부르나마 거대한 장벽이 허물어지는 것을 내심 짐작할 수 있었다. 이 느낌을 그대로 믿기로 했다.


방북 첫날 저녁 처음 만나는 북측 안내원들에게 밑도 끝도 없는 제안을 던졌다.
"남쪽에는 '꽃제비'라 불리는 사진들이나 거의 체제비판적인 사진들이 많아서 북쪽 사람들을 이해하는데 모자람이
있습니다. 당신들 살아가는 보통의 모습들을 내 느낌대로 찍으려 하니 통제하지 말아주세요. 나를 믿으셔도 됩니다."

남녘 사진기자의 느닷없는 제안을 '통 크게' 여긴 탓일까. 그들은 다음날 아침 웃으면서 답을 주었다.
"림선생! 찍고 싶은 대로 다 하시라요. 우리가 한번 믿어보갔습네다!"
무엇을 보게 될지 어느 순간에 셔터를 누르게 될지 사실 아무 것도 확신할 수는 없었다. 우리 일행의 방북일정만
기록하고 기념이
될 자리 앞에 선 채 피사체가 되고 싶지는 않았다. 오히려 비행기에서 내리는 순간 달아오른 막연한
기대심이 더 컸고, 웃음으로 내민 북측 안내원들의 손을 맞잡으면서 확신했다. 지금까지 알고 있던 것과는 다른 것을
볼 것이라는 것을.


직감은 틀리지 않았다.
남녘 우리네 삶과 다를 것 없는 일상의 형상들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거리마다 공원마다 재잘거리는
소년소녀들의 음성이 들렸다. 고무줄놀이에 정신이 팔린 여학생들 틈을 비집고 회심의 줄 끊기를 시도하는
개구쟁이 장난꾸러기가 있었고, 아이스크림을 빨며 재잘거리는 어린 아이들도 길거리에 넘쳤다. 젊고 밝은 대학생들
무리를 만나 같은 자리에 더럭 주저앉고는 막힘없는 대화로 수다를 떨기도 했다. 그렇게 가까이 다가가 말을 걸고
호기심 어린 눈빛을 함께 나누다 나도 모르게 솟구치는 흥에 어깨가 들썩거렸다. 다른 줄로만 알았는데 같은 것이
있음에 심장이 뜨거워졌다. 무엇이든 다를 것이라 믿었던 묵은 관념들이 해체되는 아주 특별한 만남들이었다.

 

딱딱한 공식일정 사이사이 내 두 눈의 방향은 언제나 거리의 사람들을 향했다. 숲속에서 밀어를 속삭이거나 손을
부잡은 채 데이트를 즐기는 젊은 연인들의 모습에 내가 그러듯 흐뭇해졌다. 볼 빨간 얼굴의 수줍음 가득한 신혼부부들,
어린 아기를 고이 안은 엄마들과 아빠의 손을 꼭 잡고 어딘가로 향하는 아이들이 눈에 띄면 한없이 들뜨는 심정으로
보고 또 보기를 멈추지 않았다. 모두 사람 사는 풍경들이었다. 해를 더해 방북의 시간이 늘어갈 수록 그동안 볼 수
없었던 또 하나의 우리들인 그들이 내 안으로 깊숙이 들어왔다. 기자로서의 사명감이나 사진작가로서의 미학적
해석이나 접근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그 이상 얻는 기쁨이 충분하게 넘쳤다.


"림선생! 사는거이 뭐 다 똑같디요. 무엇이 좋아서 그리 찍습네까? 하하하."
그 사이 몇 번이나 들었던 북측 안내원의 농 섞인 질문이다. 평범하고도 소소한 일상성에 두 눈을 고정한 책 좋아라
히죽거리는 나의 모습이 그들의 눈에는 웃음이 나올 만한 일이기도 했다. 그러나 빈곤과 억압 위주의 체제적 단면들만
주입받아온 나에게는 일상의 이질감을 벗어나는 삶의 풍경들이었고, 스스로 인식의 전환을 이룰 만한 통렬한 쾌감의
정경들이었다. 여기는 북녘 땅 평양임을 자각하는 비현실적인 실체감 속에서 오롯이 눈과 귀를 모으게 되는 특별한
순간들이 거짓말처럼 여기저기에서, 그렇게 내 안으로 들어왔다.


더욱 먼 기억들을 뒤져보면 한숨 섞인 웃음도 나온다.
어린 시절 미술시간에 머리에 뿔이 나고 송곳니를 가진 '북한사람'을 그렸다. 일면식도 없는 그들을 두려움에 떨면서
빨간색 크레파스 칠을 했다. 교육 받은 대로 그리면 칭찬을 받았고, 심지어 미술대회에 나가면 어김없이 내 손에
상장이 쥐어졌다. 목청껏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를 부르짖거나 선동적인 구호를 외치면 자연스레 칭찬과 격려가 
따라붙었다. 혹시나 동네 뒷산에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간첩이 뿌린다는 빠라를 찾아 헤매던 기억도 한자리를
차지한다. 그래야 나와 가족이 안전하다고, 그것이 나라를 지키는 것이라고 믿었으며 모두가 당연하게 받아들이던
시절이었다. 북녘 땅에 발을 딛기 전 가진 두려움의 원인이고 실체였다.

 

그곳에서 나는 '사람'을 보았다.
살아가는 삶의 단상이 남녘땅 어디에서나 보고 드는 일상과 다르지 않음을 새롭게 '보고 들었'다. 없는 것을 만들어
알게 된 것이 아니라 이념과 체제의 장벽 안에 가려 보이지 않던 삶과 존재들이 눈에 든 것이다. 깊은 새벽을 깨우는
새소리만큼 가슴 벅찬 알아차림이었다. 반백년 넘게 한쪽 면만 보고 따져 붇던 시선을 거두고보니 그들의 말처럼
사는 것이 다 똑같은 우리네 정경이었다. 마주하는 모든 찰나들을 놓치지 않으려 나의 카메라는 내내 춤을 추었다.


지난 2003년 이후 더 이상 북녘 땅을 밟을 기회는 없었다.
멈춘 걸음을 잇지 못하니 아쉬움만 세월에 섞여 하염없이 흘러내린다. 계속 만나다보니 정다운 벗 마냥 우정을 쌓았던
북측 안내원들과 보통간 기슭에서 다시 만나 룡성맥주를 곁들여 흉금 없는 대화를 나누고 싶다. 한때 남녘 대학생
학우들의 마음을 들끓게 했던 당시 김일성종합대 여대생 '장류진'씨를 만나면 이제라도 그를 찍은 사진 한 장을
건네주고도 싶다. 대동강변 공원에서 우연히 만난 수줍음 많던 신랑신부도 다시 만나 다 키운 자녀들 얘기로 꽃을
피워보는 상상도 해본다. 나아가 평양에서 사진전을 열어 남과 북이 함께 만들어 가는 평화를 노래하고 싶은 꿈도
일부러 펼쳐본다.
사람이 사람을 보는 날들은 언제 이어질 수 있을까.

상상이 현실이 되어가는 지금, 소망 하나를 품으며 다시 웃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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