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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6 - 동해로 간 스무번째 신혼여행

by 장돌뱅이. 2012. 9. 17.

*2004년에 쓴 글입니다.

 ‘신혼강조기간’
결혼을 한 후 언제까지를 신혼이라 부를 수 있을까?
한 달? 일 년? 첫 아이를 낳을 때까지?
아니면 부부싸움 열 번 할 때까지?
그것도 아니라면, 힐끗 스쳐간 그녀의 눈빛과 미소의 의미를 생각하느라 밤잠을
설치고, 공원을 걸으며 잡은 그녀의 손에서 느껴지던 짜릿함과 데이트 후에도 손안에
오래도록 남아있던 여운 - 그 감미로운 느낌이 유효한 시기까지를 신혼이라고 하면
더 적절할까?

어느 규정을 적용하건 10월로 결혼 20주년이 된 아내와 나는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확실한 ‘안(NO) 신혼’이다.
아이는 자라서 이미 대학생이 되었고, 부부 싸움은 열 번의 열 배도 더 한 것 같으니
그렇다해도 크게 억울할 것이 없겠다.
이제 내가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는 아내의 미세한 표정이나 작은 몸짓은 거의 없다.
아니 언제부터인가 아내 쪽에서도 내 쪽에서도 자신의 뜻하는 바를 직설적인 화법으로
전달하지, 애매모호한 눈빛이나 미소 등의 간접적인 방법으로 불필요한 시간 낭비를
하지 않는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이다.

공원만 함께 걸어도 느껴지던 짜릿함과 감미로운 느낌은 혹 아직도 유효하냐고?
공연히 남의 부부에게 분쟁의 단초를 제공하고 싶지 않다면, 남은 인생에서 새로
가질 수 있는 호칭이 할아버지, 할머니 밖에 없는 우리 같은 부부에게는
그런 질문을 던지지 않아야 사려 깊은 사람이 될 지도 모른다.

이런 유머(?)가 있다.

   결혼한 지 20년쯤 된 부부라고 해두자.
   자신에 대해 나날이 무관심해져가는 남편의 관심을 옛날로 되돌리고
   스스로도 신혼의 감정으로 되돌아가고 싶은 아내가 잠자리 날개 같은 잠옷을
   입고 나른한 조명을 밝힌 채 부드러운 음악과 달콤한 와인을 준비하여 남편의 귀가를
   기다렸다. 여느 때처럼 밤늦게 술에 취해 돌아온 남편은 뜻밖의 광경에 잠시 주춤
   거리는 듯 하더니 이내 방으로 뛰어 들어가 후다닥 수면제를 먹고 말았다.

GOOD OLD DAYS!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한다는 것만으로 더 이상의 무엇이 필요 없는 감동의 시절!
그러나 아무리 켜켜이 쌓인 추억이라 해도 다달이 부은 적금통장처럼 두툼해져가는
질량감으로 현실 속에 재생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감동은 언제나 짧고 진하기 때문에
감동인지도 모른다.
물속에서 움켜쥔 모래처럼 세월에 흔들리며 부풀었던 감정이 속절없이 빠져나가고 나면
우리들의 신은 영악스럽게도 그것을 다시 공짜로 리필해 주지 않는다.

현실에 부대껴 메말라 버린 꿈처럼 떨어지는 늦가을의 낙엽은 허망할 수도 있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떨어진 그 자리가 만들어온 만큼의 성장과 다음 해 봄의
새로운 꿈을 믿는 지혜일 것이다.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을 쓴 신영복이 말했다.

   사랑이란 생활의 결과로서 경작되는 것이지 결코 갑자기 획득되는 것이 아니다.
   (...) 그러므로 “당신을 사랑합니다” 라는 말처럼 쓸데 없는 말은 없다. 사랑이
   경작되기 이전이라면 그 말은 거짓말이며, 그 이후라면 아무 소용없는 말이다.  

함께 나눈 20년의 세월을 말할 때 사람들은 흔히 ‘벌써’라는 수식어을 앞세운다.
아내와 나는 거기에 ‘아직은’이라는 단서를 조심스레 덧붙이고 싶다.
‘벌써’ 지나가버린 시간 속의 기억을 곶감처럼 꺼내먹으며 살기엔 ‘아직은’
다가오는 새로운 시간들이 너무 광활하게 비어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결혼20주년을 기념하여 동해안 속초 주변을 1박 2일의 여정으로 돌아왔다.
새 부대에 채워야 할 새 술은 아내와 내게 있어 늘 여행으로 만들어진다고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니다.


양평 용문사
동해안으로 가는 길에 잠시 들린 용문사는 절 자체보다 은행나무로 유명한 곳이다.
전설에 따르면 망국의 한에 사무쳐 금강산으로 향하던 신라의 마의태자가 용문산에
들려 심은 나무라고도 하고 의상대사가 지니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은 것이
자란 나무라고도 한다.

 천이백살이라는 나이에 어울리게 풍채도 당당하여 높이 62미터, 가슴둘레 14미터,
가지는 동서로 27.1미터, 남북으로 28.4미터나 뻗어 있다.
함께 있는 용문사가 1907년의 의병전쟁 때나 한국전쟁 때 큰 피해를 입어 옛 모습을
잃어버린 것을 생각하면 이 은행나무의 무사함은 외경스럽다. 아직도 가을이면 엄청나게
많은 수의 은행을 맺을 정도로 건강하다고 한다.
우리나라에 현존하는 생물 중에 천2백년의 세월을 견딘 생물이 또 있던가?
살아있는 자체만으로 존경받을 만한 나무이다.


청간정(淸澗亭)
누가 만든 것인지 모르지만, 우리나라에는 지방마다 무슨무슨 팔경(八景)이란 이름으로
그 고장의 아름다운 곳을 자랑하는 곳이 많다.
대충 들어본 대로 떠올려 봐도 제주도의 우도팔경, 충북 영동의 양산팔경, 전북 진안의
월랑팔경, 경기 양평의 노산팔경 등이 있다. 경남 남해에는 금산38경까지 있다.
그중에서 대부분의 사람에게 가장 귀에 익은 말이 아마 관동팔경(關東八景)일 것이다.


*위 사진 : 청간정 인근에서 본 동해바다

관동팔경은 문자 그대로 대관령 너머 동쪽에 있는 여덟 명승지로 모두가 동해 바다를
배경으로 한 정자와 누대, 그리고 사찰이다. 동해안을 따라  북쪽에서 남쪽으로
통천 총석정(叢石亭), 고성 삼일포(三日浦), 간성 청간정(淸澗亭), 양양 낙산사(洛山寺),
강릉 경포대(鏡浦臺), 삼척 죽서루(竹西樓), 울진 망양정(望洋亭), 평해 월송정(越松亭)
등을 일컫는다.  


*위 사진 : 견제 정선의 청간정(간송미술관 대겸제전 도록 중)

청간정은 남한땅에서 가장 북쪽에 있는 관동 팔경이다.
그보다 위에 있는 고성 삼일포와 통천 총석정은 북한에 속해 있다.
조선시대 임금인 숙종이 이곳을 관동팔경의 하나로 꼽아 관동팔경시의 시제로 택하면서
부터 관동의 대표적 명승으로 크게 부상했다고 한다.

     가을날 만길 대에 오르매,
     아리따운 풍경 금강산을 이긴다.
     때때로 물결 부딪혀 뒤채며 눈 되니,
     흥 올라 난간에 기대어 돌아갈 줄 모른다.

조선시대 간성군수였던 이식(李植)이 편찬한 간성군지에 보면 청간정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어 놓았다.
  
     정자 위에 앉으면 물과 바위가 서로 부딪혀 산이 무너지고 눈을 뿜어내는 듯한
     형상이나 갈매기 천백마리가 아래위로 떠돌아 다니는 것을 마음껏 볼 수 있다.
     그 사이에서 일춸과 월출을 바라보는 것이 더욱 좋은데, 밤에 헌방(軒房; 정자
     한 켠에 꾸며진 방)에 누워 바람소리와 파도소리를 들으면, 창문을 뒤흔들어
     마치 뱃속에서 물잠자는 듯하다.

우리 국토의 곳곳을 순례하며 그 아름다움을 그림으로 그려내어 진경산수화의 꽃을 피운
겸재 정선도 이곳을 놓치지 않았다.
그러나 겸재의 그림을 보고 청간정을 찾는 사람은 실망을 안고 돌아설지 모른다.
그림 속의 청간정과 실재의 청간정은 일치하지 않기 때문이다.
겸재가 그린 청간정은 실재의 청간정과 이를 본 겸재의 신명이 합쳐진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위 사진 : 아름다워서 슬픈 고성의 바다

대신에 이 시대의 고성의 바다는 그 옛날과는 다른 풍경으로 가슴을 적셔온다.
바로 철조망 때문이다. 호쾌한 수평선과 푸른 바다를 조각내는 철조망은 잊고 지내던
분단의 현실을 일깨우는 이 시대의 풍경이다.
고성의 바다를 두고 누군가 ‘슬프도록 아름다운 바다’라고 했다.
철조망을 사이에 두고 조각난 고성의 바다를 볼 때면 언제나 아내와 나는
‘아름다워서 슬픈 바다’라고 그 말을 뒤집어 보곤 한다.


송지호와 옛 마을
강릉의 경포호, 속초의 청초호와 영랑호, 고성의 송지호 등 동해안에는 호수가 많다.  
모두가 석호(潟湖)이다. 석호는 해류, 조류 등의 영향으로 형성된 모래톱이 바다의
입구를 가로 막으며 생긴 호수를 말한다.  


*위 사진 : 송지호의 모습

맑은 물색과 울창한 소나무 숲이 잘 어울려 아름다운 송지호(松池湖)는 둘레가 10 리에
이르는 큰 호수이다. 바다와 연결되어 있는 탓에 숭어, 황어, 돔 등의 바닷고기와 잉어,
붕어 등의 민물고기가 함께 서식한다고 한다. 주변의 호수에 비해 오염도 되지 않았고
먹이도 풍부한 탓인지 고니, 원앙새 청둥오리 등의 겨울 철새들도 많이 찾아 온다고 한다.

옛날 이곳 부자였던 정거재라는 고약한 부자가 시주를 부탁한 스님에게 외양간의 똥을
퍼주며 내쫓았다. 스님이 문간 옆에 놓여있던 쇠절구를 집어 땅바닥에 내던지니
쇠절구가 떨어진 곳에서 물기둥이 솟아 올랐다 스님은 두루마기의 고름을 찢어 소나무
가지에 걸어놓고 사라졌다. 삽시간에 정부자의 집과 논이 물에 잠기기 시작하여 지금의
호수가 되었다. 머슴들은 스님의 옷고름에 매달려 목숨을 건졌으나 정부자는 물귀신이
되고 말았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위 사진 : 여명기 가옥

송지호 부근에 있는 여명기 가옥과 왕곡 전통 건축물 보존 지구에서는 강원도 북부
지방의독특한 구조를 지닌 집들을 볼 수 있다.
추위에 적응하기 위하여 방이 겹으로 배열되고, 외양간, 방앗간, 고방 등이 몸채 안에
붙여진 양통집이 그것이다.

그러나 여명기 가옥은 지방 상류층 가옥으로 잘 손질이 되어있긴 하나 사람이 살고 있지
않아 허전한 느낌이 들었고, 오봉리 왕곡마을은 깔끔한 보수공사로 그다지 옛스런 맛은
들지 않았다. 아내와 내가 찾았을 때도 시에서 주관하는 축제를 앞두고 마을 곳곳에
보수작업이 진행 중이었다. 저러다 마을집들이 모두 전시용소품으로 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우려가 들기도 했다. 우리가 만난 사람들 중에는 전통보존마을로 지정된
후에 집안 보수조차 마음대로 할 수 없다고 불평처럼 말하는 사람도 있었고 일체의
보수관리를 시에서 해준다고 자랑스럽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방문에서 낡은 창호지를 떼어내던 한 할머니는 겨울나기 준비를 하시냐고 묻자 며칠
뒤에 있을 왕곡마을 축제 준비를 하는 중이라며 힘들어 하셨다. 

아내와 내겐 마을길을 걷다 본 감을 따는 풍경과 사람들의 넉넉한 인심이 왕곡마을에서
만난 가장 인상적인 ‘전통’이었다. 아들과 함께 감을 따는 할머니는 아내와 내가 다가가며
인사를 건네자 감이 떫어서 줘도 먹을 수가 없다고 안타까워했다.
많은 내방객들을 경험해서인지 마을사람들은 우리가 집안을 둘러보는 것에도
전혀 개의치 않아 했다. 덕분에 들여다 본 한 집의 부엌 내부는 현대식으로 개조된 입식
부엌이었다. 부엌 한 쪽 편으로 외양간의 형태가 남아 있었지만 지금은 창고 용도로
쓰는 듯 갖가지 물건만 쌓여 있었다.

 

 “외양간이 부엌안에 있다고 타지 사람들이 우리를 보고 소랑 같이 산다고 했지만
지금은 다 옛날 얘기지요.”
집주인 할아버지는 우리 부부에게 잘 익은 홍시를 건네주며 집에 대한 자상한 설명을
들려주었다. 묻지도 않은 아들과 며느리 자랑까지 곁들여가며.

왕곡마을은 다섯 개의 산이 마을을 에워싸고 있어 한국전쟁때에도 대부분의 집들이
폭격을 피할 수 있었다고 한다. 덕분에 오늘까지도 옛집들이 고스란히 보존되어
1988년에 전통가옥보존마을로 지정될 수 있었다고 한다. 지난 96년 발생한 대형
고성산불이 발생했을 때도 부근의 산들은 대부분 불탔으나 마을에는 불길이 미치지
않았다고 하니 하늘의 복을 받은 땅에 들어선 마을임에는 틀림없는 것 같다.


미천골 선림원터
 

작년 봄 나는 혼자서 미천골 선림원터에 온 적이 있다.
오랜 세월의 두께가 두터운 적막으로만 남아있는 텅 빈 옛 절터에서 나는 맨발로
걷다가 앉았다가 누웠다를 반복하며 시간을 보내다 아내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곳에 꼭 같이 오자는 약속을 하였다.

속초비행장 부근의 메밀국수집에서 국수를 말아 점심을 먹고
아내와 나는 미천골로 향했다. 일 년 만에 약속을 지키게 된 것이다.
미천골엔 가을이 계곡의 물빛까지 짙게 물들이고 있었다.
오후의 아늑한 햇살은 나뭇잎 속속 들이 파고들어 색색으로 물든 나뭇잎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석조물 몇 기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선림원터에는 쇄락한 풀밭에
투명한 가을 햇살만이 따사롭게 스며있을 뿐 일년 전처럼 아무도 없었다.

그다지 넓지 않은 산비탈의 절터에는 삼층 석탑에서 부도, 석등, 부도비가
충분한 간격을 두고 산재해 있었다. 아내와 나는 천천히 절터를 한바퀴 돌고 난 뒤,
받침돌에 앉아 해바라기를 했다. 말없이 건너 편 산비탈에 불타오르는 단풍과
푸른 하늘을 보고 바람소리도 들었다. 나른한 졸음이 밀려왔다.
애초 여행 계획을 짜면서 선림원터의 그 한적함을 염두에 두었었다.
지난 번에도 그랬듯이 그것은 현명한 고려였다.

 햇빛 속에서 책을 꺼내 읽는 아내를 먼발치에서 바라보았다.
언제든 아내의 가슴을 넉넉하게 채우는 튼튼한 사내가 되겠다고 다짐을 해왔지만
결혼 20년을 되돌아보면 터무니없는 부실함과 허약함에 낯 뜨거워질 뿐이다.
불혹의 나이를 지나도록 나는 늘 어머니의 치맛자락에 매달리던 철부지의 모습에 머물러 있다.  

세상의 화려함에 눈 주지 않고, 우리가 함께 나눈 젊은 날의 추억과
추억만큼의 내일이 있으리라는 믿음으로 튼튼하고 당당하게 곁에 있어준 사람은 오히려 아내였다.

해가 기울어 미천골을 나와 백두대간의 구룡령을 넘어설 무렵에는 하늘에 작은 별들이  
반짝거리며 하나 둘 돋아나고 있었다. 나는 아내의 손을 힘주어 잡으며
해마다 이 맘 때쯤이면 습관처럼 반복하는 그 다짐을 해보았다.
내년에 또 다시 같은 반성과 다짐을 반복한다 하더라도 아내는
나의 그런 상투성에 언제나 따뜻한 미소로 답해 줄 것이다.
     
     세상에 귀하고 의로운 것들만 깨어서
     따뜻한 불이 되는
     이런 밤에는
     이중 고귀하고 어여쁜 별이 되어
     우리들 아내의 이름들이
     어두운 하늘에서 초롱초롱
     빛납니다.
                -나해철의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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