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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남산 예장공원 1

by 장돌뱅이. 2024. 4. 30.

남산 북쪽에 있는 예장공원은 지하철 4호선 명동역에서 가깝다. 조선시대 군사들의 무예훈련장이 있었다는 이 일대는 우리나라 근현대사의 고통스러운 역사가 집약되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일제의 조선 침략 발판인 통감부와 통감관저가 있었고 1910년 8월 22일에는 이곳에서 일제가 우리나라를 빼앗는 '경술국치'를 자행하였다. 5.16 군사쿠데타 직후에는 중앙정보부 건물들이 들어섰다.

오랫동안 독립과 민주주의의 대척점에 서서 우리를 억압해 온 현장인 것이다.
서울시는 2021년 재생 사업으로 이곳을 공원으로 탈바꿈시켰다.  

공원에 들어서면 강렬한 붉은빛의 창고 같은 바라크형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기억6"이라 이름 붙여진 건물이다. 옛 중앙정보부 6국에서 유래된 이름일 것이다.
1995년 중정에서 이름이 바뀐 안기부가 이전을 하면서 서울시가 매입한 후 여러 부처가 사용하던 정보부6국 건물은 철거 후 "기억6"이란 전시관으로 재탄생한 것이다.
 "기억6" 앞에는 철거 후 몇 개의 기둥과 잔해들을 이용한 몇 개의 조형물이 서있다.

'남산 한 번 갔다 와야 정신 차리겠어?'
일반 사람들 사이에서 농담으로도  흔히 사용하던 이 말의 근저에는  독재 권력이 무조건적인 굴종만을 강요하기 위하여 국민에게 심어놓은 공포가 깔려 있는 것이다.
그 시절 '남산'은 국가폭력의 상징으로 가히 '정부 위에 정부, 국가 위에 국가'였다.

젊은 시절부터 온갖 끔찍한 소문과 확인된 사실로 우리를 두렵게 하던 그곳은 문을 열고 들어서자 냉한 기운이 여전히 훅 기쳐오며 몸을 오싹하게 했다. 아내가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무섭다." 

벽에는 영상이 비춰지고 있었다. 한쪽 면에는 등을 진 모습의 사내가 음침하면서도 자부심 넘치는 목소리로 정보부 시절을 회상하고 있었다. 섬뜩했다.

"여길 들러간 손님들이 더러 고기 '육'자로 육국으로 부르곤 했지요.
일단 한 번 들어오면 살 한점 떼어내주지 않고는 나갈 수 없었다는 뜻으로 말이지요."

다른 쪽 벽면에는 이곳에서 고문을 당한 사람들의 실제 증언이 흐트러진 모양의 글씨로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곳에 대한 김지하의 증언이 생생하고 처절하다. 

정보부 6국의 저 기이한 빛깔의 방들.

악몽에서 막 깨어나 눈부신 흰 빛을 바라봤을 때의 그 기이한 느낌을 언제나 느낄 수 있도록 만드는 저 음산하고 무뚝뚝한 빛깔의 방들. 그 어떤 감미로운 추억도 빛 밝은 희망도 불가능하게 만드는 그 무서운 빛깔의 방들. 아득한 옛날 잔혹한 고문에 의해 입을 벌리고 죽은 메마른 시체가 그대로 벽에 걸린 채 수백 년을 부패해 가고 있는 듯한 환각을 일으켜주는 그 소름끼치는 빛깔의 방들. 낮인지 밤인지를 분간할 수 없는, 언제나 흐린 전등이 켜져 있는 , 똑같은 크기로 된, 아무 장식도 없는 그 네모난 방들 ···(중략)··· 그 방들 속에 갇힌 채 우리는 열흘, 보름 그리고 한 달 동안을 내내 매 순간순간마다 끝없이 몸부림치며 생사를 결단하고 있었다.

- 김지하의「고행-1974」중에서 -


김지하는 민청학련에 자금을 전달하고 배후조종을 한 혐의로 제1심 군법회의에서 사형을 선고받는다. 김지하는 재판 과정에서 "현 정권은 무너지는 것이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진술한다. 이후 국방부장관의 확인 과정에서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어 복역 중 약 10개월 만인 1975년 2월 15일 형집행정지로 출감한다. 

지하 취조실

예장공원 주변에는 중정의 흔적이 여러 곳에 흩어져있다. 중정 본관은 유스호스텔로 지금도 남아 있고, 감찰실 건물은 TBS교통방송 건물로 사용되다가 지금은 철거되었다.
서울종합방재센터도 중정이 쓰던 건물이다. 

소방재난본부 뒤쪽에 있는 "문학의 집·서울"도 그렇다.
원래 무소불위 권력의 서슬이 퍼렇던 중앙정보부장 공관으로 사용되던 곳이다.
이 역시 서울시에서 매입하여 2001년 10월에 개보수를 하여 개관하였다.

문학의 집에서는 문학특강이나 시 낭송회, 전시회 등을 개최하는 열린 공간이었으나 이번에 가보니 어쩐 일인지 이번에 가보니 운영을 중단한다는 공고가 붙어 있었다.
홈페이지를 보니 올 3월까지도 행사가 있었던데 까닭을 알 수 없었다.
지원이 중단된 것일까? 아니면 찾는 사람이 별로 없었을까? 

처음 문을 열었던 2001년 11월 가을 나는 아내와 이곳을 찾은 적이 있다.
그리고 졸저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여행』에 이렇게 썼다.

"늦가을의 분위기를 풍기는 단풍나무와 신갈나무의 산자락에 파묻힌 "문학의 집"에서 지난 시대의 어두운 자취는 읽어낼 수 없었다. 밝은 조명 속에 경쾌한 클래식 음악이 끊임없이 흘러나오고 집안 곳곳에는 뽀송뽀송하고 향긋한 새집 냄새가 가득하였다. 현관 오른쪽의 전시관에는 유명 문인들의 필기도구와 육필 원고 등이 전시되고 있었다.
이렇게 시치미를 떼도 괜찮은 것일까? 아내와 함께 차부하고도 문화적인 향내가 묻어 나오는 분위기에 젖어들다 문득 엉뚱한 생각이 들었다. 새로이 탈바꿈을 한 "문학의 집"처럼 정녕 우리 시대는 이제 지난 시대의 어두운 터널에서 확실히 벗어난 것일까? 그 끔찍했던 기억들을 이제는 잊어도 되는 것일까? 수많은 시민들과 학생들을 가두고 고문하던 하수인들과 그들을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인적·사회적 토대도 더불어 정리된 것일까? 그 토대에 논리적 정당성을 부여하던 언론과 학자들은 국민에게 자신들의 지난 행적을 사과하고 참다운 화해를 구했던가?"

그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기억6"의 벽면 영상에 나온 중정의 사내는 이런 말도 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우리는 소멸하지 않습니다. 의심이 결코 소멸하지 않듯 말이죠. 다만 잠시 사라질 뿐 우리는 고도로 숙련된 의심의 기술을 다시 국가를 위해 실행하고 후대에게 전수해 줄 때가 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을 따름입니다. 음지야말로 우리가 서식하는 곳이니까요."

우리가 질문을 멈추지 말아야 할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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