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발소 벽에 붙은 푸시킨의 시가 내가 맨 처음 읽은 시(詩)고,
한문투성이의 김소월의 시집이 내가 맨 처음 손으로 잡아본 시집이라면,
윤동주의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은 내가 맨 처음으로 산 시집이다.
고등학교 교과서에서 「별 헤는 밤」을 배우고 난 직후였을 것이다.
그 시가 너무 좋아서 더 많은 윤동주의 시를 읽어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70년대 서울 종로2가에는 서점들이 많았다. 당시의 서점들은 지금은 모두 없어졌다.
가장 큰 서점이 종로서적이고, 그 옆으로 규모가 좀 작은 양우당과 그보다 더 작은
대운당(?)이라는 서점이 가까이 있었다. 나는 윤동주의 시집을 양우당에서 샀다.
정확히 기억을 하는 이유는 왜 그랬는지 시집 안쪽 표지에 그것을 적어둔 탓이다.
40년이 다 되다가보니 흰색의 표지는 갈색으로 변했고 그마저도 표지가 떨어져서
꼭 옛날 우리집 김소월의 시집처럼 되었다. 그래도 시를 읽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어
새 시집으로 바꿀 생각은 없다. 손때가 묻어 시집 자체에 정감도 간다.
‘독립을 향한 의지’와 ‘종교적 순교’ - 윤동주 시의 대표적 주제로 고등학교 시절 배운 것이다.
단편적 사전지식은 시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지만, 때때로 시를 읽으며 느낄 수 있는
상상력을 방해하는 장애물이 될 수도 있다.
모든 시를 처음엔 그냥 편하게 낭송하듯 읽어볼 일이다.
*위 사진 : 일본 교토 도시샤(同志社) 대학 교정에 있는 윤동주 시비
아무래도「서시」를 빼놓을 수는 없겠다.
중요하달 수는 없는 사항이지만 (내가 알기로는) 윤동주가
이것을 “서시”로 제목을 붙여 쓴 것은 아니다.
해방 후 시집을 만들며 첫 머리에 서시로 집어넣었다고 알고 있다.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
한점 부끄럼이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나는 괴로워했다.
별을 노래하는 마음으로
모든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
그리고 나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야겠다.
오늘 밤에도 별이 바람에 스치운다.
-1941년 2월20일에 씀 -
이 시를 읽으면 맑고 순수함이 온몸으로 물들어 오는 것 같다.
부끄러움을 깨우치는 죽비 같은 것이 어깨를 내리치는 것도 같고.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마음은 어떤 마음일까?
그는 여리고 정직한 마음으로 시와 삶을 강하게 단련시켰던가 보다.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 시가 이렇게 쉽게 씌여지는 것은 / 부끄러운 일이다.”
(「쉽게 씌여진 시」 중에서)
얼마 전 우연히 7-80년대 친구들에게서 온 편지 몇 장을 발견했다.
편지 속에 윤동주의 시를 인용하거나 언급한 글이 있었다. 그 편지들을 다시
읽어보며 ‘내가 읽은 쉬운 시’라는 글을 써볼까 하는 생각을 처음으로 해보았다.
7080의 암울한 사회적인 분위기에 견주어「십자가」의 일부분을 인용한
친구의 편지는 제법 의미심장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쫓아오든 햇빛인데
지금 교회당 꼭대기
십자가에 걸리었습니다.
첨탑이 저리 높은데
어떻게 올라갈 수 있을까요.
종소리도 들려오지 않는데
휘파람이나 불려 서성거리다가,
괴로웠든 사나이,
행복한 예수.그리스도에게
처럼
십자가가 허락된다면
모가지를 드리우고
꽃처럼 피어나는 피를
어두워가는 하늘 밑에
조용히 흘리겠습니다.
-「십자가」-
나이가 들면서 윤동주의 시중에 「사랑스런 추억」이 좋아졌다.
누구에게나 청춘에 대한 추억은 아름답기 마련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거기 남아 있는 젊음’과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멀리 실려온’ 지금을
아직은 그냥 있는 그대로 욕심 없이 돌아보고 싶기 때문이다.
봄이 오든 아침, 서울 어느 쪼그만 정거장에서
희망과 사랑처럼 기차를 기다려,
나는 플랫폼에 간신한 그림자를 털어트리고,
담배를 피웠다.
내 그림자는 담배연기 그림자를 날리고
비들기 한떼가 부끄러울 것도 없이
나래속을 속, 속, 햇빛에 비춰, 날었다.
기차는 아무 새로운 소식도 없이
나를 멀리 실어다 주어,
봄은 다 가고- 동경교외 어느 조용한
하숙방에서, 옛거리에 남은 나를 희망과
사랑처럼 그리워한다.
오늘도 기차는 몇 번이나 무의미하게 지나가고,
오늘도 나는 누구를 기다려 정거장 가차운 언덕에서
서성거릴게다.
-아아 젊음은 오래 거기 남아 있거라.
-「사랑스런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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