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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

···살았으므로 ···없었으므로

by 장돌뱅이. 2024. 5. 2.

*경향신문 [김용민의 그림마당]

그는 밀림의 제왕이다
그러나 차지한 영역은 있으나 영토는 없고
먹잇감은 있으나
백성도 머리를 조아리는 신하도 없는 왕이다
그는 숲의 강자이다
그러나 그를 경계하는 무리는 많아도
우러러보는 짐승은 없다
우기가 찾아오면 사슴도 원숭이도 숲을 떠나는데
그는 영역을 지키느라 서너 달씩 굶주리곤 한다
굶주려도 풀을 뜯거나 나뭇잎의 초록을 씹지 않는 게
왕의 자존심
그러나 제 영역을 침범한 사나운 놈과 싸워 지기라도 하면
바로 꼬리를 내리고 초라한 뒷걸음으로 물러나야 한다
어떤 때는 열다섯번에 한번쯤 사냥에 성공할 때도 있고
먹다버린 썩은 고기를 핥아야 하는 날도 있다
맹수라고 하지만
코뿔소나 버펄로와 정면에서 겨루어본 적 드물고
전열을 흐트러뜨린 뒤 길 잃은 어린것의 목을 물어뜯는 것이
제왕의 일반적인 사냥법이다
가치에 대해 생각해본 적 없고
진보라든가 공생, 평화로운 숲에 대해 사고해 본 적 없다
그건 초식동물이나 하는 일
더 크고 사나운 이빨
더 젊고 큰 발톱에 밀려 터전을 잃거나
사냥에서 상처를 입고 쓰러져 신음할 때
새 한 마리 그를 위로해주지 않는다
어떤 나무 어떤 바람도 그를 위해 울어주지 않는다
그는 강자였고 늘 포효하며 살았으므로
짓밟고 죽이고 누리며 평생 살았으므로
하소연을 들어줄 착한 짐승이나
죽음을 지켜줄 풀잎을 가까이 두어본 적 없었으므로

- 도종환, 「맹수」 -

비루한 하이에나도 맹수라 불러야 할지는 잘 모르겠지만······
만화를 보고 시를 읽으며 차라리 웃어나 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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