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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9 - 황동규의「즐거운 편지」와 김정환의 「가을에」

by 장돌뱅이. 2014. 5. 10.


시인 황동규는 고등학교 시절, 연상의 여대생을 사랑하여 한 편의 시를 지었다고 한다.
바로 「즐거운 편지」다. 1958년 그의 시단 데뷔작이기도 하다.

  
1
   내 그대를 생각함은 항상 그대가 앉아 있는 배경에서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나 언젠가 그대가 한없이 괴로움 속을 헤매일 때에
 
오랫동안 전해오던 그 사소함으로 그대를 불러보리라.

  
2
  
진실로 진실로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까닭은 내 나의 사랑을 한없이 잇닿은
 
그 기다림으로 바꾸어 버린 데 있었다.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그동안에 눈이 그치고 꽃이 피어나고
 
낙엽이 떨어지고 또 눈이 퍼붓고 할 것을 믿는다.
                                                           
- 황동규, 「즐거운 편지」-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것처럼 ‘사소함으로’ 불러보는 그대.
그러나 해와 바람의 운행은 늘 자연스럽게 거기에 있을 뿐이다.
그래서 그의 ‘사소한’ 사랑은 변함이 없고 한결같다.
게다가 그의 ‘사소함’ 은 언젠가 눈발처럼 그치는 어느 순간에도
다시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한다지 않는가.

올해는 아내와 삶을 가꾼 지 30년째 되는 해이다.
시를 읽는 동안만큼이라도 그 ‘사소함’을 흉내 내어 아내를 불러보고 싶다.

아내와 내가 연애하던 시절 좋아하던 사랑시는 김정환의 시였다.
7말8초(70년대 말 80년대 초)답게(?) 연애 시속에도 등장하는 ‘조국’이라는
단어가
다소 생뚱맞아 보이지만 아무튼 우리가 함께 읽고 쓰고 외웠던 시다.

  
우리가 고향의 목마른 황토길을 그리워하듯이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내게 오래오래 간직해준
  
그대의 어떤 순결스러움 때문 아니라
  
다만 그대 삶의 전체를 이루는, 아주 작은 그대의 몸짓 때문일 뿐
  
이제 초라히 부서져내리는 늦가을 뜨락에서
  
나무들의 헐벗은 자세와 낙엽 구르는 소리와
  
내 앞에서 다시 한번 세계가 사라져가는 모습을
  
내가 버리지 못하듯이
  
내 또한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가 하찮게 여겼던 그대의 먼지, 상처, 그리고 그대의 생활 때문일 뿐
  
그대의 절망과 그대의 피와
  
어느날 갑자기 그대의 머리카락은 하얗게 새어져버리고
  
그대가 세상에게 빼앗긴 것이 또 그만큼 많음을 알아차린다 해도
  
그대는 내 앞에서 행여
  
몸둘 바 몰라하지 말라
  
내가 그대를 사랑하는 것은
  
그대의 치유될 수 없는 어떤 생애 때문일 뿐
  
그대의 진귀함 때문은 아닐지니
  
우리가 다만 업수임받고 갈가리 찢겨진
  
우리의 조국을 사랑하듯이
  
조국의 사지를 사랑하듯이
  
내가 그대의 몸 한 부분, 사랑받을 수 없는 곳까지
  
사랑하는 것은
                                
- 김정환, 「가을에」-

그래서 30년 동안 정말 시처럼 살았냐고 묻지 마시라.
산다는 게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매일 지지고 볶는 일 아닌가.
다만 오늘처럼 비가 촉촉이 내리는 분위기 좋은 저녁이면
가끔씩 아내와 나 둘이서
술잔을 기울이며 서로 수고했다고
밤늦도록 상대방 띄워주기를 반복할 때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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