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아이가 초등학교 다니던 시절 나는 해외 출장이 잦았다.
출장 가기 전날이면 딸아이는 가끔씩 엽서와 편지를 써서
아무도 몰래 나의 손가방이나 출장 짐 속에 넣어두곤 했다.
이국에 도착한 첫날 호텔방에서 짐을 풀 때 우연히 발견할 수 있었던 딸아이의 기특함.
나는 나중에 그 편지들을 작은 봉투 속에 모아서 출장을 갈 때마다 가지고 다녔다.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아침, 호텔을 나서기 전 커피를 마시며 봉투를 열고 그것들을
하나씩 다시 읽어보노라면 신비로운 향기와 따뜻함 같은 것이 온몸으로 번져왔다.
가족이라는 공동체만이 줄 수 있는 위로이자 행복이었다.
내가 편지를 마지막으로 쓴 것은 언제였는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아마 십여 년 전 회사 일로 집과 가족은 울산에 두고 서울에서 장기 체류를 하며
주말 부부를 일 년 정도 할 때였을 것이다.
그때 식구들에게 가끔씩 우편엽서를 써 보냈다.
간단한 글과 함께 직접 그린 그림으로 장식을 하기도 하고,
마음에 드는 신문의 만화도 오려붙이기도 했다.
딸아이는 아직 이것들 중의 한두 장을 가지고 있다.
그 이후론 편지나 엽서를 써 본 적이 없다.
작년 초, 새해에 꼭 하고 싶은 일로 주위에 편지나 엽서를 많이 보내는 것을 꼽아보았다.
그러나 결과는 한 통도 보내지 못했다(않았다).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라고, 편지를 통하지 않고서도 소통을 할 수 있는
다양하고 편리한 방법들이 많기 때문이라고 말하기에 앞서 내가 너무 가볍고 각박하게
살았던 것은 아닐까 생각해보게 된다. 전자메일이나 SNS를 이용한다고 상대방과
소통하고자 하는 마음이 우편 메일과 차이가 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내가 아날로그 구세대이기 때문이겠지만 그래도 손으로 또박또박 적어 내려간,
손으로 만져볼 수 있는 감촉이 있는 편지에서는 더 많은 정감이 묻어나는 것 같다.
시인은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정문 앞에 와서” 사랑하는 사람에게 편지를 썼다.
조용필의 노래에는 “베고니아 화분이 놓인 우체국 계단, 어딘가에 엽서를 쓰던 그녀의 고운 손”도 있다.
직접 행복을 드러내 말하지 않지만 시와 노래의 상상 속에서는 따뜻한「행복」이 느껴진다.
얼마 남지 않은 미국 생활을 마치기 전에,
여행을 하는 도중에, 주위가 조용해진 깊은 밤에 읽던 책을 덮고,
가까운 사람들에서 짧은 엽서라도 써보아야겠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에머랄드빛 하늘이 환히 내다뵈는
우체국 정문 앞에 와서 너에게 편지를 쓴다
행길을 향한 문으로 숱한 사람들이
제각기 한 가지씩 생각에 족한 얼굴로 와선
총총히 우표를 사고 전보지를 받고
먼 고향으로 또는 그리운 사람께로
슬프고 즐겁고 다정한 사연들을 보내나니
세상의 고달픈 바람결에 시달리고 나부끼어
더욱 더 의지 삼고 피어 흥클어진 인정의 꽃밭에서
너와 나의 애틋한 연분도
한 망울 진홍빛 양귀비인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보다 행복하나니라
오늘도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나니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이 세상 마지막 인사가 될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 유치환의 시, 「행복」-
이 시 역시 구태여 청마의 시집을 통하지 않더라도 한국사람이라면 다양한 경로를 통하여
들어보거나 읽어봤음직한 시일 것이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유치환은 시인 이영도를 사랑하여
무려 5천통에 달하는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이 시도 그녀를 향한 사랑을 표현한 시일 것이다.
그러나 이영도는 기혼자였던 유치환의 사랑을 끝내 받아주지 않았다.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임은 뭍같이 까딱 않는데
파도야 어쩌란 말이냐
날 어쩌란 말이냐
-유치환의 시, 「그리움」-
유치환은 일방통행의 짝사랑이 갖는 감정을 위에서처럼 절실하고 절박하게 노래한 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사랑을 「행복」이라는 유장하고 세련된 감성으로 풀어낼 줄도 알았다.
절박함과 행복함, 그 두가지의 조화가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시를 읽는 것은 쉽지만 사랑은 어렵고 사랑의 정의나 이해도 어렵다.
신기한 일은 그래도 사람들은 누군가 자신만의 특별한 사람을
만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한 평생을 함께 한다는 것이다.
그런 모두가 사랑과 삶의 ‘위대한 달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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