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곡우(穀雨).
봄으로 한 걸음 더 다가선 날이다.
추운 겨울을 이기고 난 봄은 대부분 환희와 부활의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기다리지 않아도 오고
기다림마저 잃었을 때도 너는 온다.
어디 뻘밭 구석이거나
썩은 물웅덩이 같은 데를 기웃거리다가
한눈 좀 팔고, 싸움도 한판 하고,
지쳐 나자빠져 있다가
다급한 사연을 들고 달려간 바람이
흔들어 깨우면
눈 부비며 너는 더디게 온다.
더디게 더디게 마침내 올 것이 온다.
너를 보면 눈부셔
일어나 맞이할 수가 없다.
입을 열어 외치지만 소리는 굳어
나는 아무것도 미릴 알릴 수가 없다.
가까스로 두 팔을 벌려 껴안아보는
너, 먼데서 이기고 돌아온 사람아.
- 이성부,「봄」-
봄비와 함께 생명의 곡식들이 윤택해진다는 날에 나라 안팎으로 아픈 소식들이 줄을 잇는다.
성지순례 길에 나선 무고한 사람들이 먼 나라에서 누군가의 끔찍한 행위로 생명을 잃고, 나라 안에서는 또 다른 누군가의 어처구니없는 실수로 많은 젊은이들이 안타깝게 세상을 떠났다.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만 내려놓는 게 아니라 옆으로도 벌려놓는다.
그렇기에 나무 한 그루의 실뿌리만 끊겨도 온 산의 나무들이 아픈 몸살을 하는 법이다.
산수유 한 그루 캐어 집에 옮기려고
산에 가만가만 숨어들었다.
나무는 뿌리를 밑으로 밑으로 내려놓았겠지.
자그마한 산수유 찾아 삽날을 깊숙이 꽂았다.
이제 한 삽 뜨면 산에게서 내게로 올 게다.
겨울 내내 집안은 텅 비고 날 찾아오는 이 없었어.
이제 마당귀에 산수유 심어놓고
그 옆에서 꽃 피길 기다리면
이 산이라도 날 찾아오겠지.
삽자루에 힘을 주어도 떠지지 않아서
뿌리 언저리 손으로 파헤쳐 보았다.
산수유는 뿌리를 옆으로 옆으로 벌려놓고 있었다.
나는 삽날 눕혀 뿌리 밑을 돌아가며
둥그렇게 뜬 뒤 밑동 잡고 들어올렸다.
한 그루 작은 산수유 실뿌리 뚜두두둑 뚜두두둑 끊기자
산에 있던 모든 산수유들 아픈지 파다닥파다닥
노란 꽃망울들 터뜨렸다.
- 하종오, 「초봄이 오다」-
갑작스럽게 가족들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으로 가슴을 찢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보낸다.
위로의 무기력과 평온한 나의 오늘 저녁을 사과드리면서.
*2014년 2월 : 경주에서 대학생 새내기들의 사고가 있었다.
'일상과 단상 > 내가 읽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12 - 정지용의「춘설(春雪)」 (0) | 2014.05.10 |
---|---|
내가 읽은 쉬운 시 11 - 고은의 「산 길」 (0) | 2014.05.10 |
내가 읽은 쉬운 시 9 - 황동규의「즐거운 편지」와 김정환의 「가을에」 (0) | 2014.05.10 |
내가 읽은 쉬운 시 8 - 황진이 (0) | 2014.05.10 |
내가 읽은 쉬운 시 7 - 유치환 (0) | 2014.05.10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