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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시집 『돼지들에게』

by 장돌뱅이. 2013. 5. 30.


최영미의 3번째 시집이다.
파격적인 언어로 주목을 받았던 앞의 두 시집에 비해 풍자와 냉소가 강해졌다는 느낌이다.

시속에 ‘돼지’와 ‘여우’와 ‘진주’는 이렇게 나온다. 

   그는 원래 평범한 돼지였다.
   감방에서 한 이십 년 썩은 뒤에
   그는 여우가 되었다.
   (중략)
   그는 자신이 실제보다 돋보이는 각도를 알고
   카메라를 들이대면 (그 방향으로) 몸을 틀고
   머리칼을 쓸어 넘긴다
   무슨 말을 하면 학생들이 좋아할까?
   어떻게 청중들을 감동시킬까?
   박수가 터질 시간을 연구하는
   머릿속은 온갖 속된 욕망과 계산들로 복잡하지만
   카메라 앞에선 우주의 고뇌를 혼자 짊어진 듯 심각해지는  

   냄새나는 돼지 중의 돼지를
   하늘에서 내려온 선비로 모시며  

   언제까지나 사람들은 그를 찬미하고 또 찬미하리라.
   앞으로도 이 나라는 그를 닮은 여우들 차지라는
   변치 않을 오래된 역설이......나는 슬프다.
                                       -「돼지의 변신」중에서-  

   세계를 해석하는 입들은 지치지도 않네.
   마이크 앞에서 짖어대는
   늙고 노회한 여우와
   그를 따르는 어리고 단순한 개들
                                       -「하늘에서 내려온 여우」중에서-  

   그는 자신이 돼지가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스스로 훌륭한 양의 모범이라고 굳게 믿고 있다.
   신분이 높고 고사한 돼지일수록 이런 착각을 잘한다.
                                       -「돼지의 본질」중에서-  

위선과 거짓의 세상에서 심지어 ‘진주’는 ‘여우’를 만나고
우리가 ‘짐작하는 대로’의 ‘러브스토리’를 시작하기도 한다.

(올 대선판의 모습에서, 그리고 최근에 불거진 가진 자들의 다양한 ‘더러움’ 속에서,
‘돼지’와 ‘여우’와 ‘진주’의 모습을 극명하게 보았던가?
어제 오늘의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런 것도 같다.
그들의 어울림은 공중화장실 벽에 그려진 노골적인 음화을 닮아 있다.

도덕성은 가장 중요한 능력이다.
그것은 결코 따로 분리되어 존재하는 개념이 아니다.
그리고 이번 대선에서도 가장 중요한 평가 기준으로 여전히 유효하다.
아직 우리는 최소한의 도덕도 지켜지지 않는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
부패가 만연한 사회에서 최(우)선의 정책은 반부패일 뿐이다.)  

그러나 세상의 부조리에 대한 그녀의 공격이 아무리 신랄하고 거침이 없다고 해도
풍자나 냉소에는 결국 그 부조리를 넘어 설 수 없는 한계와 아픔이 내재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녀의 축구사랑에서 비롯된 몇 편의 축구를 소재로 한 시도 그녀의
이미지와 어울리지 않게(?) 좀 진부해 보인다.  

내가 그녀의 시를 좋아하는 이유는
“배반당하더라도 이 지저분한 일상을 끌고 여행을 계속하련다.”
(「런던의 실비아 플래스」중) 같은 씩씩함이거나
아래에 인용하는「지중해의 노을」같은 상큼함 때문이다. 

    나폴리에서 폼페이로 가는 기차에서 나는 영원에 도달했다. 달리는 스크린의 끝에서
   끝으로 천년의 바다가 대기를 밀어올리고 미완성의 연애처럼 아련하게 퍼지는 막막함.
   형태 없는 아름다움이 하늘까지 피어올라, 목적지를 행해 돌진하는 20세기의 바퀴 소리
   를 잠재웠다. 흐린 분홍의 수증기가 슬며시 토해낸 추억의 소람함이여.  

    내가 읽은 만 권의 책을 불살라도, 단단한 강철의 창틀을 밀어내며 내 눈을 적시는
   부드러움을 만들지 못하리라. 나와 바깥이 구분되지 않았던 찰나였지만, 우주가 내게
   팔을 벌렸다. 바람과 빛과 물이 포개지며, 生과 死가 맞닿고, 순간이 영원이었다.
   내가 지중해이며 내가 노을이었다.

    번호표가 붙은 좌석의 안락을 거부하고 창가에 서서 술렁이던 그리움이여. 추억에 갇힌
   그를 황혼의 바다에 풀어주며 나는 돌아섰다. 허랑허랑 빈손으로 폼페이를 찾아가는
   이 몸도, 달리는 폐허인 것을......

(2007.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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