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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과 단상/내가 읽은 글

내가 읽은 쉬운 시 28 - 박목월의「나그네」

by 장돌뱅이. 2015. 5. 3.

      나그네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 노을이여 - 지훈


       강나루 건너서
       밀밭 길을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길은 외줄기
       남도 삼백 리

       술 익는 마을마다
       타는 저녁놀

       구름에 달 가듯이
       가는 나그네

박목월의 시를 이야기 하면서 「나그네」를 빼놓을 순 없다.
「나그네」는 1946년 박목월, 조지훈, 박두진이 함께 발간한 시집 『청록집』에 수록되었다.
1940년대 초 조지훈이 박목월에게 보낸 시 「완화삼(玩花衫)」
가운데
“술 익는 강마을의 저녁노을이여”라는 대목에서 힌트를 얻어
박목월이 화답시로 조지훈에게 보낸 작품이다.
완화삼은 꽃을 보고 즐기는 선비를 의미한다.
당시 20대였을 젊은 시인들의 문학적 나눔이 격조가 있어 보인다.

「나그네」는 우리의 토속적 음률과 서정으로 한 폭의 동양화 같은 선명하고 참신한
이미지를 성공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세상사를 달관한 듯한 나그네의 유려한
행보가
정겨운 풍경 속에 녹아있다. 박목월의 시적 성취는 정지용이
“북에는 소월, 남에는 목월”이라고 한 평가로 압축될 수 있겠다.

그러나 젊은 시절 나는 박목월이 속한 청록파의 ‘순수’를 의심한 적이 있다.
더 솔직히 말하자면 ‘평가절하’가 맞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문학을 포함한 모든 예술은 현실에 근거를 두고 역사적 당위와 진보를 위해
복무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깊이 있는 독서와 사색을 바탕으로 한
진지한 탐구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여기저기서 알게 된 얕은 귀동냥이 바탕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이제 와서 보니 그런 기준이 전혀 터무니없다거나 잘못된 것이었다는 뜻은 아니다.
시에 대한 기본적 평가 기준으로 그런 생각은 적어도
나에게는 여전히 유효하다.
다만 당시에는 그런 기준의 적용이 너무 단순하고 기계적이었다는 사실은 인정하고 반성하지 않을 수 없다. 

70년 대 중반 어느 날. 친구들과 대학 교정 노천극장의 계단에 앉아 있었다.
그때 훤칠한 키에 단정하게 다듬은 스포츠형 머리, 몸을 곧게 세운 걸음걸이의
그가 우리 앞 저만치를 지나갔다. 검은색 양복차림의 그에게서 꼿꼿한 옛 선비의
맵시가 났다.
우리들 중 누군가 그를 알아보았다.

“박목월시인이다.”
“윤사월과 나그네의 청록파 시인!”
곧이어 누군가 말을 이었다.
“근데 저 양반 어용이야.”

어용(御用) - 박목월은 이승만과 박정희 대통령 찬가에 가사를 지었다.
그리고 오랫동안 육영수여사의 ‘문학 가정교사’ 역할을 했다. 육여사의 사후에는
전기 『육영수 여사』를 집필했다. 어떤 과정을 거쳐 거기에 다다랐건
그리고 그것이 어떤 의미이건 그는 권력에 가까이 그리고 오래 있었다.
그런 이력보다 척박했던 시절에 그가 지은 ‘용비어천가’와
참신한 서정의 그의 시의 공존은
이해하기 힘든 것이기도 했다. 

    우리나라 대한나라 독립을 위하여, 여든 평생 한결 같이 몸 바쳐 오신, 
    고마우신 리 대통령 우리대통령, 그 이름 길이길이 빛나오리다.

    오늘은 리 대통령 탄생 하신 날, 꽃피고 새 노래하는 좋은 시절,
    우리들의 리 대통령 만수무강을, 온 겨레가 다 같이 비옵나이다.
                                                        
- “우리 대통령 노래” -


    어질고 성실한 우리 겨레의, 찬란한 아침과 편안함 밤의, 
    자유와 평화의 복지 낙원을, 이루려는 높은 뜻을 펴게 하소서,
    아아아 대한 대한 우리 대통령, 길이길이 빛나리라 길이길이 빛나리라.

    가난과 시련의 멍에를 벗고, 풍성한 결실과 힘찬 건설의,
    민주와 부강의 푸른 터전을 이루려는 그 정성을 축복하소서.
    아아아 대한 대한 우리 대통령, 길이길이 빛나리라 길이길이 빛나리라.
                              
                          -(박정희) “대통령 찬가” -


박목월의 시에 대한 나의 감동은 그의 그런 행적으로 많이 무너져 내렸다.
박목월이 그리는 순수와 자연은 현실과 동떨어진 ‘관념산수(觀念山水)’의 세계일 뿐,
현실과 역사가 요구하는 ‘진경산수(眞景山水)’는 아니라는 생각도
하게 되었다.
그 시절 나는 박목월의 문학적 세계를 현실도피로 규정하였고,
현실도피는 또 다른 의미의 ‘권력 유착’이라고 나름 결론지었다.

어느 모임에선가, 혹은 어느 책에선가, 아니면 어느 술자리에선가,
시「나그네」에 대한 언급이 있었다.
"일제강점기 후반의 우리 민족의 처절한 상황에 「나그네」의 서정은
산뜻함을 넘어 너무 사치스러워 보인다. 아무리 시적 언어라 하더라도
특히 ‘술 익는 마을’이란 표현은 쌀 수확고의 80% 이상을 수탈당하여
나무껍질과 풀뿌리로 목숨을 이어가는 수많은 삶들에 대한 무지이거나 외면,
혹은 모욕에 가까운 것이다 등등."

그런 언급은 박목월시에 대한 나의 결론의 정당한 근거가 되었다.
당시엔 애인이었던 아내와 「나그네」를 두고 논쟁을 벌인 적도 있다.
아내는 현실이
고달플수록 아름다운 꿈을 꿀 수 있어 시이자 문학이라며
「나그네」를 옹호했고,
나는 그런 식의 꿈은 ‘문학의 이름을 빌린 아편’일
뿐이라고 맞서기도 했다.

박두진의 말대로 박목월(청록파)에게 순수와 자연은 일제 강점 말기의
“온갖 제약을
타개하기 위한 유일한 혈로”였는지 모른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지식인의 나약한
변명으로 평가했다.

내가 (서정주와 함께) 박목월의 시집을 다시 보기 시작한 것은 십여 년 전 부터였다.
나이가 40대 중반을 넘기면서 기준이 바꾸었다기보다는 나름대로 기준의 폭을
넓혔기 때문이라고 나 스스로는 이해한다. 더불어 그의 행적은 물론 그의 시에
대해서도 호불호를 말하고, 또 비판을 할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시 자체를 내칠
필요는 없는 일이라는 생각도 들었다. 그의 시를 외면한다는 것은 세상에
흔치 않는 아름다움 하나를 잃어버리는 것과 같은 일이겠다.

각설하고 그의 시 한편을 더 읽어보자.

   이쯤에서 하직하고 싶다.
   좀 여유가 있는 지금, 양손을 들고
   나머지 허락 받은 것을 돌려보냈으면.
   여유 있는 하직은
   얼마나 아름다우랴.
   한 포기 난을 기르듯
   애석하게 버린 것에서
   조용히 살아가고,  
   가지를 뻗고,
   그리고 그 섭섭한 뜻이
   아아 먼 곳에서 그윽히 향기를 
   머금고 싶다.
 
                       -「난(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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