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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애란2

영화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삶의 방향을 바꾸는 많은 일들은 갑자기, 느닷없이, 난데없이, 예기치 않게 뒤통수를 후려치며 온다. 열무김치를 담그는 명지에게 낯선 번호의 전화가 전해준 소식처럼. 현장학습 시간에 늦었다고 허둥대며 뛰어가던 남편의 뒷모습이 마지막이었다. 남편의 장례를 마치고 명지는 폴란드의 바르샤바로 떠난다. 한국을 떠나 한 달 동안 비우게 된 자신의 집에서 지내보라는 친척 언니의 배려 덕이었다. 바르샤바에서도 명지의 일상은 한국에서와 다르지 않다. 아니 일상이랄 것도 없이 감각도 멈춰버린 듯한 고요한 시간을 '도랑 위에 쌀뜨물 버리듯 그냥 흘려' 보내며 지낸다. 남편을 잃기 전, 나는 내가 집에서 어떤 소리를 내는지 잘 몰랐다. 같이 사는 사람의 기척과 섞여 의식하지 못했는데, 남편이 세상을 뜬 뒤 내가 끄는 발 소리.. 2023. 11. 14.
중요한 고요가 머리 위를 지날 때 김애란의 단편소설 「칼자국」은 이십여 년간 칼국수 장사하며, 무능력하고 바람까지 피운 아버지를 대신하여 가정을 이끈 억척스럽고 부지런하면서도 다정했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과 그리움을 그렸다. 어느 날, 나는 내가 진정으로 배곯아 본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어리둥절해진 적이 있다. 궁핍 혹은 넉넉함을 떠나, 말 그대로 누군가의 순수한 허기, 순수한 식욕을 다른 누군가가 수십 년간 감당해 왔다는 사실이 이상하고 놀라웠던 까닭이다. 오랜 세월, 어머니는 뭘 재우고, 절이고, 저장하고, 크게 웃고, 또 가끔은 팔뚝의 때를 밀다 혼자 울었다. 여자가 칼 갈아 쓰면 팔자가 드세다는데 아직까지 서방이나 새끼 잡아먹지 않은 걸 보면 괜찮은가 보다 능청도 떨면서. 생일이면 양지를 찢어 미역국을 끓이고, 구정에는 가래.. 2023. 7. 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