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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2

철든 장돌뱅이 "나도 남편이 끓여주는 커피 한번 먹어 봤으면 좋겠다." 30대 중반쯤 되었을 때일까? 아내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말했다. 내가 대답했다. "그래? 나가자. 맛난 커피로 사줄게" 아내는 어이없어했다. 아내가 원한 것은 인스탄트 커피라 단지 뜨거운 물을 끓여 붓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종류 불문 음식을 만들면 죽을병에 걸리는 줄 알던 시절의 이야기다. 장돌뱅이에게도 그런 '야만'의 시절이 있었다. 요즈음 부엌에 서서 음식을 만들다 보면 문득문득 그 시절이 떠오른다. "뭐 먹고 싶어?" 주말에 아내에게 묻는다. 묻기 전에 나는 이미 아내의 취향을 알고 있다. "파전? 수제비?" 예상했던 대로 둘 다 오케이다. 쪽파로 만든 파전도 맛있지만 대파를 갈라 만든 파전은 또 다른 맛이다. 달군 프라이팬에 기름을 .. 2024. 1. 28.
내가 읽은 쉬운 시 121 - 오세영의「그릇」 '내가 드디어 그릇을 샀다'는 글을 본 지인이 "그릇 자체의 아름다움도 매혹의 영역이지만 그 담김의 상상이 결국 그릇의 매력"이라는 격려의(?) 글을 보내주었다. '담김의 상상'이란 말이 좋아서 나는 며칠동안 틈틈히 마음 속으로 되새기며 다녔다. 담김만큼 담김이 만들어낼 관계에 대한 상상이 더 매력적이라는 생각도 해보면서. *신영복 선생님의 글 "당무유용" 노자(老子)에도 비슷한 말이 나온다. "埏埴以爲器當其無有器之用(선식이위기 당기무 유기지용)", 즉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있음'으로 해서 그릇의 쓰임이 생긴다"는 뜻이다. 노자의 깊은 뜻을 헤아리기는 힘들지만, 무엇인가 담길 수 있는 '비어있음'의 가치가 모양과 색상, 무늬와 질감 등의 '유(有)'보다 본질적이거나 최소한 상호보완적이.. 2019. 6. 2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