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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8 - 아직 서울이 행복한 이유, 북한산

by 장돌뱅이. 2012. 10. 17.

<산으로 가기>

지방에서 거주하던 몇 해 전까지 해마다 명절이 오면 우리 가족은 이른바 ‘역귀향’대열에
합류해야 했다. 본가와 처가가 모두 서울에 있는 탓이었다.

서울을 오르내리는데만 이틀을 허비해야 했고 나머지 하루도 본가와 처가를 돌아야했으므로
우리 가족에게 공식적인 명절 연휴 3일은 사실상 계속적인 이동을 감수해야하는 강행군의
다른 이름일 뿐이었다.

서울로 이사를 온 후 생긴 좋은 점 중의 하나가 바로 그 명절 연휴가 그야말로 연휴다워졌다는 점이다.
올 추석 연휴는 토요일과 일요일에 붙어있어서 여느 해보다 긴 휴가가 되었다. 게다가 회사에서 연휴
뒤끝에 추가로 하루를 더 휴무로 정하면서 더욱 느긋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아내와 나는 오래 전부터 계획하였던 북한산과 도봉산 등반을 실행에 옮기기로했다.
고작 높이 8백여 미터 정도의 산을 두고 무슨 계획 운운 할지 모르지만 우리 부부에게는,
특히 아내에게 두 산은 사실 오래 준비를 해온 서울 근교 산행의 최종 목적지였던 것이다.

북한산과 도봉산을 목표로 아내는 홍천의 팔봉산에서 시작하여 아차산, 용마산, 불곡산, 운길산,
검단산, 청계산, 관악산, 수락산, 불암산, 마니산 등을 올랐고,
가끔씩 한강변에서 걷기와 달리기를 반복해 왔다. 솔직히 산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아내가 섭렵한 산들이 가벼운 차림으로 걸어서 쉽게 오를 수 있는 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체력이 약한 아내에게는 그리 만만한 산이 아니었다.  

산행의 의미와 감동이 산의 높이에 비례하는 것이 아니라고 나는 믿는다.
“푸른 산은 말이 없으나 만고에 전해온 책(靑山不言萬古書)” 이라는 옛글도 산의 높낮이를 구
분하여 말하지는 않았다. 극한의 고통을 극복하며 더 높은 곳을 오르는 인간의 꿈과 의지는
위대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위대한 행위는 아니더라도 마을 가까이까지 내려온 야트막한
산자락을 걸으며 숲과 바위와 흙과 물이 만들어내는 작고 오랜 ‘책’ 한권을 가슴에 담는
일은 그에 못지않은 오붓한 기쁨이 넘치는 일인 것이다.

<'희고 큰 보석', 북한산>

우리 국토의 70%가 산이라는 말은 우리가 초등학교 때부터 배운 지리 상식이다.
한국의 해는 산에서 떠서 산으로 진다. 국토의 어디를 가든 시야에서 산이 사라지는 경우는 없다.
때문에 한국인에게 산이 없는 자연 경험은 상상할 수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특별히 북한산 아래
서울이라는 도읍을 정한 선조들의 안목은 칭송받아 마땅하다. 북한산 없는 서울은 상상만으로 끔찍하다.

이중환은 그의 책 『택리지』에서 “산과 물을 경험할 수 없으면 맑은 정서를 가질 수 없다”고 했다.
휴일이면 온 산을 뒤덮는 인파는 문명으로는 결코 충족할 수 없고 위로받을 수도 없는 무엇인가를
자연에서 구하고자하는 행렬인 것이다. 산은 우리의 정서를 맑게 하고 산행에서 돌아온 우리는
우리의 일상을 맑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에 산은 아름답다.  

 

애초 토요일 오후에 가려던 일정을 일요일 새벽으로 바꾸었다.
산길 곳곳에 오르내리는 사람들로 인한 정체를 피하고 싶었던 까닭이다.
명절을 앞두고 많은 사람들이 서울을 빠져나간 탓인지 이른 아침의 도로는 한산했다.
평소 같으면 어림없을 시간이지만 집을 떠난지 채 30분이 안되어 북한산 자락에
도착할 수 있었다.

북한산은 고양시와 서울의 은평구, 서대문구, 종로구, 성북구, 강북구, 도봉구에 걸쳐 있어
산행 경로가 무수히 많다. 우리는 백운대 매표소-하루재-인수산장-백운산장- 위문을 통하여
백운대에 오르는 짧은 코스를 잡았다. 하산은 다시 위문으로 내려와 용암문을 거쳐 도선사
앞으로 내려오기로 했다.

북한산은 산의 형상이 마치 어린 아이를 업은 듯하다하여 붙여진 부아산(負兒山) 혹은 부아악
(負兒岳)이라는 이름 이외에도 화산, 한산으로도 불렸다. 또 백운대, 만경대, 인수봉이 뿔처럼
솟았다하여 고려시대 이후에는 삼각산(三角山)으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시대 병자호란 때 중국으로 끌려가면서 남긴 김상헌의“가노라 삼각산아 다시 보자
한강수야....” 하는 시조의 삼각산이 바로 그곳이다.

북한산은 능선을 따라 20 여개의 봉우리가 있고 크고 작은 계곡이 발달하여 천혜의 군사요충지로
평가돼 왔다. 이 때문에 삼국시대에는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각축이 치열했다. 지금의 비봉 부근에
위치한 진흥왕순수비는 그 시대의 산물이다.

북한산에는 여러 번의 축성이 이루어졌는데 지금 남아 있는 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으면서
피난의 치욕을 겪은 조선의 조정이 이곳을 좋은 피난처로 선택하면서 숙종3년(1711)에서부터
숙종37년(1745년) 사이에 쌓은 것이다. 고종 이후 1백년 이상 방치돼 있던 이 산성은 서울시의
‘정도 600년’ 기념사업으로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다.  

하루재에 올라서면 인수봉이 바로 코앞으로 다가온다.
북한산의 최고봉은 백운대이지만 인수봉이 북한산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백운대를 압도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울 시내 대부분의 지역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북한산은 해발 836미터의
결코 높지 않은 산이면서도 웅장해 보인다. 그리고 그 웅장함은 인수봉에서나온다.
거대한 화강암 덩어리. 나이는 무려 1억 6천만년을 넘는다. 거기에 비해 ‘서울 정도 600년’ 아니
그 이전의 백제 시조인 온조왕이 고구려에서 남하하여 부악산에서 도읍지를 조망한 2000년 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더라도 서울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다.

백운산장에서 따뜻한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잠시 휴식을 취하노라니 여기저기서 일본말이 들린다.
모두가 인수봉 바위벽을 타기 위해 온 일본인들이다. 정공채 시인이 북한산을 ‘서울의 보석’ 이라고
했다던가. 너무 자주 잊고 사는 감이 있지만 서울에 사는 우리는 북한산이란 큰 보석을 가까이 두고
사는 부자들이다.

아내의 가쁜 숨소리와 함께 가파른 바위길을 더듬어 오른 백운대 정상에서 북한산 줄기를 조망하는
일은 매우 호쾌하다. 북으로는 우이령을 넘어 도봉산으로 이어지고 남으로는 문수봉으로 뻗은 힘찬
산줄기와 깊은 골은 그대로 북한산이 서울의 진산일 수 밖에 없는 이유를 보여준다.

공자는 동산(東山)에 올라가서는 노(魯)나라를 작게 여기고 태산(泰山)에 올라가서는 천하를 작게
여겼다고 한다. 공자의 기개를 따를 수는 없지만 산꼭대기에 올라 (욕심으로 달아오른) 눈을 식히고
(일상으로 억눌린) 가슴을 씻어내라는 선인들의 가르침만은 저절로 느낄 수 있었다.


<'가을 숲에 걸린 사슴뿔' 같은 산, 도봉산>

북한산을 오른 사흘 뒤 아내와 나는 도봉산을 오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북한산처럼 도봉산도 새벽산행을 하려고 하였으나 연휴의 달콤한 아침잠에 빠져있다
오후에야 출발을 하게 되었다.

도봉산 전철역에서 내려선 산행 기점을  일부러 찾지 않았어도 무수히 많은 산행인파에 파묻혀
걷다보니 저절로 도착하게 되었다. 매표소에 이르는 도로 좌우는 갖가지 음식을 파는 식당들이
줄을 지었고 식당마다 이미 산행을 마치고 뒷풀이를 하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도봉산은 “함경도 안변부 철령의 일맥이 남으로 500-600리를 달려서 양주의 여러 작은 산이 되고,
북동쪽에서 비스듬히 돌아들면서 갑자기 솟아나” ( 이중환의 『택리지』) 높이 740미터의 자운봉을
정점으로 만장봉, 선인봉을 거느리면서 남북으로 주능선을 뻗친 산이다.

1983년에는 우이령 남쪽의 북한산과 합쳐 북한산국립공원으로 지정되었다.
북한산과 도봉산을 합친 면적은 78.5 km2이며 연간 탐방객은 450만명을 넘어서1km2당 탐방객 수가
약 58,000명이나 된다고 한다. 설악산은 연간 탐방객이 350만 명으로 밀도가 940명에 불과하다고 하니
북한산 지역은 한국에서 탐방객 밀도가 최고로 높은 지역이다.
이런 사실은 산행 도중에도 실감할 수 있었다. 등산로 곳곳에서 산을 오르는 사람과 내려오는 사람들이
마주쳐 정체현상을 만들고 있었다.  

도봉산 산행 코스는 도봉매표소-도봉대피소-석굴암을 거쳐 자운봉 옆의 신선대를 오르는 것으로
잡았다. 도봉산은 북한산에 비해 경사가 조금 더 가팔랐다. 때문인지 바윗길을 오르는 모든 사람의
목덜미와 셔츠가 땀에 흥건히 젖어있다. 아내 역시 막바지 경사에서는 스틱을 나에게 넘겨주고
아예 손과 발을 동시에 사용하여 기어오르면서 연신 땀을 훔쳤다.
산이 주는 건강한 땀방울이다.

신선대의 정산에서 도봉산의 줄기를 조망하는 일도 북한산 백운대의 그것만큼 호쾌하다.
날씨마저 청명하여 시야는 끝간 데 없이 펼쳐진다. 남쪽으로 북한산 아스라이 눈에 들어오고
왼편으론 자운봉과 만장암 등의 육중한 바위봉우리가 옛 사람이 말한 대로 “소라고동처럼 상투를
틀어올린 듯 ” 서 있다. 거기에 로프를 타고 바위를 오르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귀에 들릴 듯
가까워 보였다.

누군가 멀리 서쪽으로 고기비늘처럼 번쩍이며 길게 누워있는 것을 두고 한강이라고도 하고
서해바다라고도 하며 입씨름을 했다.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는 사방을 휘둘러 거칠 것 없는
아득한 공간에 솟아 있는 느낌이었다. 숨을 고른 아내와 얼굴에 바람을 맞으며 정상의 바위에
기대어 세상을 조망하니 문득 “자유가 보인다”는 몇해 전 텔레비전 속의 광고문구가 떠올랐다. 

   산은 자유요 바람이요 고욜세
   커서 좋고 깊어서 더욱 좋네
              - 김광섭의 시, 「세상」중에서 -  

늦게 산행을 시작한데다 산 정상에서 꾸무럭거린 탓에 내려오는 길엔 해가 기울어 어느 새
골짜기에는 산그늘이 덮이고 있었다. 추분이 지났으니 이제 밤이 노루꼬리만큼씩이라도 길어지고
있을 것이었다. 설악산의 단풍이 벌써 뉴스를 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단풍은 위도상으로
매일 20킬로미터식 남하를 한다고 하니 10월 중순이면 도봉산도 그 절정을 이룰 것이다.
옛 기록에 도봉산을 두고 ‘사슴뿔을 가을숲에 걸어놓은 것’같다고했으니 그 눈부신 모습을 보러
가을이 깊어지면 다시 찾아와야겠다는 다짐을 해보았다.

산을 내려와 전철역으로 향하기 전 고개를 들어 다시 도봉산을 우러러 보았다.
어두워져가는 노을을 배경으로 도봉산은 우직하게 서 있었다.
그런 도봉산이 고마우면서도 어딘가 외로워보였다.
북한산공원을 관통하는 도로가 생긴다고 한다.
어디 그 도로뿐인가? 

   사람의 발길에, 터무니없는 문화재복원에, 찻길에, 산성비에 북한산의
   여기저기가 허물어지고 있다. 산자락 한 군데가 뭉텅 잘려나가 집들이
   들어서고 찻길이 나는가 하면 몇 년 새 등산로가 커다란 수로처럼 패여나가
   있다. 이제 우리는 우리의 북한산 사랑법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보아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 월간 산, 2001년 6월호 기사 중에서-

(20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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