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6년 10월 13일>
22:00 1호선과 4호선이 만나는 동대문역의 동대문시장 주차장은 주말 저녁이면 전국 각지의
산으로 떠나는 산행버스의 출발장이 된다. 가뭄과 늦더위로 단풍이 예년만 못하다는
보도가 있었지만 주차장엔 관광버스가 줄지어 서있고 가을 산행을 떠날 사람들이 피워내는
부산함이 가득하다. 낮에 전화로 예약을 해두었던 덕유산행 버스에 올라 자리를 잡는다.
<10월 14일>
02:30 출발지인 육십령에 도착.
산행가이드가 30분 정도 늦어졌다고 말해준다.
육십령은 남북으로는 백운산과 덕유산을 나누고 동서로는 경남 함양과 전북 장수를 나누는,
백두대간의 마루금 위에 있는 고개이다. 지금은 전주에서 대구까지 이어지는 26번 국도가 지난다.
옛 글에 “행인이 이곳에 이르면 늘 도적에게 약탈을 당하므로 반드시 60명이 되어야만 지나가곤
했는데 그것이 이름이 되었다”고 하였다.
버스에서 내리자 가을밤의 싸늘한 냉기가 옷 속으로 파고든다. 산행을 시작하면 곧 더워질
것이므로 잠시 견뎌 보려했으나 추위가 만만치 않다. 이내 겉옷을 꺼내 입는다. 잠시 몸을 이리저리
움직여 근육을 풀고 신발끈과 배낭끈을 다시 알맞게 조이니 몸이 가뿐해진다.
난데없는 인기척에 놀란 듯 마을의 개들이 짖기 시작한다.
02:40 산행 시작.
도로 옆에서 바로 산으로 오른다. 부드러운 흙길이지만 초입부의 경사는 만만찮다.
헤드랜턴을 밝히고 일렬로 서서 걸어가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커져가면서 개 짖는 소리는 점점 멀어진다.
하늘엔 추석을 일주일 지나 조각배처럼 이지러진 달이 높이 떠있다. 도시에서 밀려난 보석 같은 별들이
산으로 오를수록 반짝이며 가깝게 다가온다. 이토록 맑은 달과 별은 야간산행을 하는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즐거움이다. 발아래 마을의 불빛도 또 다른 세상의 별인 양 따뜻하게 떠있다.
03:25 가파른 고빗길을 넘어 1,026m의 할미봉에 도착.
낮에는 주변의 산봉우리와 능선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 같은 곳이라지만 새벽엔 오직 달빛이
비추는 드넓은 하늘만 통쾌할 뿐이다. 선 채로 잠시 숨을 고르고 겉옷을 벗어 다시 배낭 속에 넣는다.
새벽 공기는 더 이상 냉랭하지 않고 시원하데 다가온다.
할미봉은, 적어도 문헌적으로는 합미봉이 맞다.
옛날 한 도승이 이 산속에 우리나라 군사가 수년 먹을 쌀이 쌓여 있는 격이라 했다 하여 합미봉이라
불리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고 한다. 도대체 쌀과는 상관이 없을 바위 봉우리에 무슨 근거로
그런 이름을 붙였는지는 모르겠지만 한 때 이곳에 몰리브덴 광산이 개발되어 각지에서 몰려든
광부들의 밥벌이터가 된 적이 있었다고 하니 도승의 내공이 상당했던 것 같다.
04:20 할미봉을 지나자 길은 편안한 능선길이다.
길 오른편으로 가래길이 나오는 지점에 도착하자 누군가 이정표를 랜턴으로 비추면서
교육원 삼거리라고 알려준다. 오른쪽 갈래길을 따라 내려가면 덕유교육원에 닿는다고 한다.
05:30 삼거리를 지나면서 본격적인 오르막길이 시작된다.
이제까지 그런대로 유지해오던 대열이 흐트러지면서 일행들은 점차 체력이 비슷한 소그룹으로
분열된다. 잡목과 산죽 사이로 난 길을 지나자 경사는 한층 더 급해지면서 바위지대가 나타난다.
고개를 들어보니 시커먼 그림자로 우뚝한 봉우리 위쪽 하늘에 북두칠성이 손잡이 부분을 아래쪽
으로 향한 채로 곧추 서있다. 정상에 오르도록 고개를 들 때마다 북두칠성은 그 모습으로 있다.
숲이 없는 바위길은 냉랭한 바람이 매섭게 옷 속으로 파고들며 젖은 몸을 시리게 했다.
육십령을 떠난 지 2시간 50분만에 장수덕유산 (서봉)에 올랐다.
아직 동이 틀 기운은 어디에서도 쉽게 느껴지지 않는다.
06:00 남덕유산 정상(1,507미터).
장수덕유산을 지나자마자 길은 바위 사이로 수직으로 떨어졌다. 필요한 곳마다 설치된 밧줄을
잡고 어두운 바위를 더듬어 내려왔다. 견고해 보이던 어둠은 장수덕유산을 내려오는 동안에
서서히 묽어졌다. 남덕유로 오르는 산길은 랜턴의 불빛이 없이도 발을 헛디디지 않았다.
사람들은 남덕유로 오르는 길과 월성재로 가는 사이에서 잠시 망설인다. 남덕유 정상은 북덕유로
가는 주능선에서 살짝 옆으로 비껴있어 오르내리는데 필요한 3-40분의 시간과 땀을 저울질
해보는 것이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남덕유로 오르는 길로 들어섰다. 남덕유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고 싶었다.
예상 시간으로는 넉넉했지만 혹시라도 일출의 순간을 놓칠까 조급한 마음이 들어 걸음을 재촉했다.
해돋이가 아니라도 나는 남덕유를 거쳐서 갔을 것이다. 종주라는 것이 반드시 최단경로의 마루금
밟기만을 의미하는 아닐 것이며, 속도를 경쟁하는 경기처럼 산행을 할 필요도 없으니 체력이
뒷받침 되는 한 가능한 많은 곳을 돌아서 가보고 싶기 때문이다.
06:30 산정상의 추위와 맞서 발을 구르며 기다린 끝에 동쪽 하늘의 구름 사이로 조그맣게 얼굴을
내미는 노란 첫 햇살을 보았다. 햇살은 삽시간에 크게 자라나더니 계곡이나 바위틈에서
스멀거리던 마지막 어둠까지 몰아내 버린다. 굽이치며 뻗어나간 산줄기가 그 아래 낮게
엎드린 마을과 함께 싱싱한 햇살을 받으며 제 모습을 드러낸다.
우리의 산하! 무슨 다른 말이 필요하랴.
북의 핵실험으로 세상이 어수선하다. 온갖 말들이 판단을 어렵게 하고 정신을 어지럽게 한다.
나 같은 무지렁이야 주변 강대국 지도자나 각양각색의 국내정치인들이 내뱉는 온갖 '요설'들의
진짜 속내를 알 수 없다. 솔직히 알고싶지도 않다.
그들이 단순한 일을 복잡하게 풀어가는 것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니까.
해법은 우리가 아는 단순한 상식에 있는지도 모른다. 북의 핵개발의 책임이 온전히 북에만
있느냐 그렇게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간 미국에게도 있느냐 하는 논의는 접어두더라도
북핵의 존재가 문제라면 남쪽의 핵의 존재 유무도 한번쯤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이십여 년 전에 읽어본 어떤 글에는 미국의 한 연구소에서 “남한에 배치되어 있는 미국
핵탄두의 수를 약 600개로 추산” 했다고 쓰여 있었다.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더욱 심각했던
문제는 그것이 철저히 미국의 전술적 필요에 따라 배치되었고 통제될 뿐 우리 정부의 그 누구도
그 배치의 과정이나 사용의 결정에서 실질적으로 배제되어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이 아직 남아 있는지 이제는 모두 남한 밖으로 철거되었는지 나는 아는 바 없다.
다만 아직 남아 있다면 북의 핵도 남의 핵도 이 기회에 모두 미국으로나 가지고 가라고 단순하게
정리하고 싶다. 미국의 ‘핵그늘’을 ‘핵우산’으로 생각하는 일부 사람들로부터는 비웃음을 살지도
모르겠지만.
지금의 상황에서 민족이니 통일이니 하는 단어의 효용성은 위축되어 있는 듯 하다.
많은 사람들이 냉소적으로 외면할지 모른다. 그러나 오늘의 이 위기도 분단상황에서
파생된 것이라 생각을 해보면 통일은 공허한 정치적 구호가 아니라 더욱 적극적으로
모색되어야 할 시대적 책무가 된다.
‘가장 비싼 외교가 가장 싼 전쟁보다 낫다’는 말도 있던가.
시인 신동엽이 노래했다.
“한라에서 백두까지 향그러운 흙가슴만 남고 그 모오든 쇠붙이는 가라”고.
저기 치자빛 아침 햇살 듬뿍 받는 양지바른 언덕은 다만 “머리에 흰 수건 두른 아낙들이
안방 이야기를 주고 받으며 햇빛에, 목홧단 콩깍지를” 말려야 할 곳일 뿐이라고.
'지하의 핵'도 '지상의 핵도' 땀 흘려 일하고 자식 낳고 키우며 살아가는 우리에게는
그저 쓰레기일 뿐이다.
어렵지만 좀더 멀리 보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이다. 우리는 새로운 시간으로
들어서기 위한 마지막 9부 능선을 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다시 살벌한 옛 시대로 돌아가기에는 지나온 시간과 길이 너무 어둡고 길었다.
일출을 보느라 시간을 지체했다. 남덕유를 거치지 않고 앞서간 일행을 따라잡기 위해
서두르게 된다. 월성재로 내려가는 길은 편안하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는
것은 당연한 세상의 이치이다. 남과 북도 그럴 것이다.
09:40 1492미터 높이의 무룡산 정상도착.
오르는 길 곳곳이 계단보수공사로 어수선하지만 사방으로 터진 능선길을 걷는 것은 더할
나위 없이 상쾌하다. 무룡산으로 오르내리는 길 어디에서나 우람한 몸체를 좌우로 뒤틀며
남북으로 길게 뻗어나간 덕유산 산줄기의 ‘용이 춤추는(무룡 舞龍)’ 듯 한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다. 잘 발달된 근육과 억센 힘줄 같은 산맥은 멀리 하늘 끝까지 또 다른 산줄기와
겹겹이 포개지면서 뻗어나가 마침내 푸른 하늘과 같은 색이 되어버린다.
10:40 동엽령 도착.
무룡산 정상에서 동엽령으로 내려가는 길은 산죽밭이 자주 나온다.
길이 순탄하고 전망도 좋아 가볍게 내려 설 수 있다. 동엽령에 도착하니 왼편 칠연폭포
쪽에서 올라오는 등산객들로 조용하던 산길이 갑자기 부산스러워진다. 칠연폭포 코스는
덕유능선으로 오를 수 있는 최단거리여서 산행인들이 자주 이용한다고 한다.
11:55 덕유평전.
가파른 중봉으로 오르기 직전에 펼쳐진 평원지대인 덕유평전은 넉넉하고
푸근한 덕유산의 품성을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풍경이다. 봄과 여름이면 많은
야생화를 볼 수 있다고 한다. 덕유평전도 초록의 산죽을 제외하곤 가을빛을 담고
있다. 올 가을 이상고온의 날씨라지만 덕유평전에서의 따가운 햇살은 싫지 않다.
서울로 돌아갈 차편만 아니라면 계단길 중간에 앉아 덕유평전을 내려다보며 해가
뉘엿해지도록 오래 해찰을 부려도 좋을 것이란 생각을 해본다.
산에 들어가는 일이 반드시 / 그 산 정수리를 밟고자 함은 아니라고 /생각한 지
오래다 / 산꼭대기에 올라가거나 말거나 / 중턱 마당바위에 드러누워 담들거나 몸
뒤채기거나 / 계곡에 웃통 벗어놓고 발 담그거나 햇볕 쏘이거나 / 아무튼 이런
일들이 모두 그 산을 가득히 / 내 마음 속에 품고 돌아와 / 묵은 책을 펴들어
만나듯이 / 새롭게 만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넉넉한 덕유평전도 데불고 가서 /
내 쩔쩔매는 나날도 갈수록 너그러워지기를 바란다 / 서울 변두리 / 이미 고향이
돼버린 거리 좁은 골목 거쳐 / 내 집에도 내 어질러진 방에도 / 이 산속 고요함과
살랑거리는 외로움을 풀어놓으면 / 한달쯤은 아마 나도 / 잘 먹고 잘 살아 부러울
것이 없을 터이다
-이성부의 시, 「덕유평전」 중에서-
12:10 중봉 도착.
전망대처럼 만들어 놓은 정상에 사람들이 많다. 향적봉이 건너다보이고
노랗게 벼들이 익어가는 무주의 들이 내려다보인다. 잠시 난간에 기대어 섰다가
향적봉으로 향한다. 곳곳에서 죽은 주목들이 눈에 띈다.
12:40 향적봉에 도착.
높이 1,614미터로 남한 제4위의 봉우리. 사람들이 많다.
특히 향적봉 표지석 주변의 바위는 마치 장터거리처럼 북적인다.
어느 산이건 정상은 산행의 대표적인 목적지이니 당연하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향적봉의 번잡스러움은 다분히 무주리조트의 시설물인 곤돌라 때문이다.
곤돌라를 타고 올라오면 향적봉 바로 아래까지 손쉽게 올라올 수 있다.
자신의 다리와 체력만으로 향적봉에 설 수 없는 사람에게도 정상의 호쾌한
분위기를 맛보게 해주었다는 점에서 곤돌라에 대해 트집을 잡고 싶진 않다.
나도 체력이 약한 아내와 곤돌라를 이용해 본 적이 있으니까.
하지만 곤돌라를 설치하면서 어쩔 수 없이 가해진 자연훼손은 그렇다 치고라도 그
이후로 정상부의 식생의 피해도 심해졌다는 보도도 있고 보면 곱지 않은 시선이
가는 것도 사실이다. 곤돌라 종점에서 보는 경관도 정상에서 보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으니 곤돌라에서 정상에 이르는 등산로는 폐쇄를 하거나 일정기간
휴식년제를 도입해 보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13:40 백련사를 지난다.
백년사는 천년고찰이라지만 한국전쟁 때 절 건물이 대부분
소실되어 옛맛은 느껴지지 않는다. 구천동 계곡의 끝에 위치한 이 깊은 곳까지
온전할 수 없었다는 사실에서 덕유산이 감내한 고난의 역사를 생각해 보게 된다.
백련사를 지나면서부터 길은 차가 다닐 수 있을 정도로 평탄하게 바뀐다. 33경의
빼어난 아름다움은 널찍하게 닦여진 도로에 상처를 입은 채 주무대에서 조금
밀려난 느낌이다. 한 때 오지중의 오지를 상징하는 말이었던 ‘무주구천동’이라는 말도
더 이상 어울리지 않아 보인다. 다만 산 위에서와는 달리 활엽수가 만들어내는
계곡의 단풍만은 올해가 ‘단풍 흉년’임을 감안할 때 현란한 모습 그대로였다.
15:00 삼공리 매표소를 지나 음식점에 도착.
시원한 냉막걸리를 거푸 두 잔 들이키는 것으로 산행을 마감했다.
막걸리맛을 극대화하기 위해 백련사를 지나면서부터는 목마른 것을 참으며 물을 마시지
않기로 일행과 약속했던 터라 타는 갈증을 적셔주는 그 맛은 여느 때보다 시원하고 진했다.
많은 사람들이 갖가지의 이유로, 갖가지의 경로를 통해, 갖가지 생각에 젖어 산에 오른다.
산은 그 모든 것을 받아주는 어머니와 같은 품성을 지닌 존재이다. 산은 내내 사람들의 발
아래 누워있을 뿐이지만 사람들을 이끌고 안내하며 겸손과 용기와 자부심을 북돋우고 가르친다.
‘산을 오르는 것은 책을 읽는 것과 같다(讀書如遊山)’고 했다. 가치의 발견과 해석이란 점에서
그럴 것이다. 산등성이를 오르내릴 때는 자신이 내뿜는 가쁜 숨소리와 풀나무를 스치는 발걸음
소리만이 전부인 것 같지만 산마루에 앉아 이마의 땀을 훔칠 때쯤이면 지나온 길은 그와는 전혀
다른 어떤 의미와 가치가 되어 다가오지 않던가. 남덕유에서 북덕유에 이르는 마루금의 기억은
내게 그런 감동적인 장편소설이 되어 남는다.
덕스럽고(德)과 넉넉한(裕) 덕유산!
제 삶의 무게 지고 산을 오른다. / 더는 오를 수 없는 봉우리에 주저앉아 /
철철 샘 솟는 땀을 씻으면, 거기 / 내 삶의 무게 받아 /
능선에 푸르게 걸어 주네, 산
이승의 서러움 지고 산을 오르다. / 열두 봉 솟아 있는 서러움에 기대어 /
제 키만한 서러움 벗으면, 거기 / 내 서러움 짐 받아 /
열두 계곡 맑은 물로 흩어 주네, 산산
쓸쓸한 나날들 지고 산에 오르다. / 산꽃 들꽃 어지러운 능선과 마주쳐 /
네 생애만한 쓸쓸함 묻으면, 거기 / 내 쓸쓸한 짐 받아 /
부드럽고 융융한 품 만들어 주네, 산산산
-고정희의「서시」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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