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과 사진/한국

지난 국토여행기10 - 이태원, 서울 속의 지구촌

by 장돌뱅이. 2012. 10. 21.

어제와 오늘의 이태원
국토는 우리가 사는 삶의 터전이다.
삶은 터전을 변화시키며 변화된 터전은 다시 우리의 삶을 변화시킨다.
그 변화의 과정과 의미가 역사일 것이니 국토는 우리의 삶과 역사가 흘러가는 큰
강물이고 소용돌이치는 현장이며 그 정직한 반영이다. 소설가 박태순이 그의 국토
여행기에서 “땅이 곧 사람이며 사람이 곧 땅”이라고 말한 이유가 거기에 있을 것이다.
따라서 모든 역사가 그렇듯 국토에 대한 의미와 해석, 느낌과 감정은 시대와 환경에
따라 언제나 변하는 것이다.

이태원동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고려시대부터 여행자에게 편의를 제공하던 숙소가 있던 이태원('李泰院' 혹은 '利泰院')은
조선시대에 들어서도 같은 목적의 역원(驛院)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한양 주변 에는 네 곳에 역원이 있었다. 이태원은 영남방면에서 서울로
들어 오는 첫번째 관문이며 한강에 인접하여 옛날부터 교역이 성행하던 지역이라고 한다. 

일제강점기동안에는 이태원동은 인근에 조선주둔 일본군사령부가 들어서고 일본군의
사격연습장으로 이용되는 등 군사적 목적으로 활용되기도 했다.
한국전쟁 이후에는 일본사령부 위치에 미8군이 주둔하면서 이태원에는 미군들을
상대로 한 위락시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7-80년대의 젊은 시절 아내와 나의 기억 속에 이태원은 외국군에게 ‘점령당한’
기지촌의 의미로 떠오른다. 그 시절 이태원은 마치 한반도의 왜곡된 현대사를
집약적으로 보여주는 듯한 민족적 굴욕과 서글픔, 그리고 분노가 서린 땅이었다.

특히 이 땅에 진주한 미군의 본질을 적나라하게 꿰뚫어 볼 수 있었던 80년의 광주
민중항쟁을 겪으면서 이제까지 ‘혈맹’의 우방이었던 미국(미군)에 대한 사회적인
자각도 더욱 심화되고 일반화 되었다.


   무서워라 무서워라 낯선 사람들 틈에
   나는 병신처럼 움츠러들고,
   공연히 공연히 사시나무 떨듯 하는구나.
   헬로우, 왜 그러냐고 묻지마라.
   이것은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이것은 진실로 살아있는 것이 아니다.
   아직은 이 고삐 풀리지 않았으므로
   나는 전혀 타의로 침묵하고,
   우스워라 우스워라 발버둥쳐도
   내 땅에서 오히려 남의 땅 한가운데
   사는 것만 같으니.
   이러지 말자 이러지 말자 아무리 고개를
   가로 저어도
                 - 양성우의 시, 「이태원에서」 -


 이천년 대에 들어오면서 이태원을 둘러싼 환경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기 시작한다.
미군용산기지의 한강 이남으로의 이전이 본격화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의
자주 역량의 성장 때문이 아니라 미군의 세계 전술과 전략의 변화에 기인한 것이라
한반도 전체적으로는 ‘이태원’의 장소 이전에 지나지 않지만 부분적으로 볼 때는
반세기동안 이태원의 성격을 규정지었던 근본적인 요인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이 되겠다.  

 문제는 미군이 떠난 뒤에도 계속되어야 할 남아 있는 사람들의 삶이다.
이제 새로운 존재 양식의 이태원이 필요한 시기가 다가온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이태원은 70년대 후반부터 값싸고 특징 있는 보세물품을 살 수 있는 장소로
내외국인에게 알려져 왔다. 한때는 각종 피형 제품과 유명브랜드의 ‘짝퉁’을
저가에 구입할 수 있는 쇼핑타운으로 알려지기도 했다. 또한 이태원은 외국공관과 관저
등을 비롯해 외국인의 집단거주지가 형성되면서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적인’
거리로 변모해 왔다.

서울시는 1997년 9월 이태원을 서울시 최초로 관광특구로 지정한 바 있다.
이태원은 외국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상점, 외국인들이 자국음식을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식당, 외국인들의 체형을 고려한 큰 치수의 의류와 신발을 살 수 있는 등
외국인에게 가장 편리한 유무형의 인프라 갖춘 장점을 지닌 곳이다.
이 때문에 이태원은 하루 5천명의 관광객을 불러 모으고 있다.

이른바 ‘코리안드림’을 꿈꾸며 우리나라로 들어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어느 덧 우리
사회의 일원이 된 외국인 노동자의 경우에서 보듯 국제화와 다른 문화와의 공존은 피할
수 없는 시대적 대세가 되었다. 그런 면에서 왜곡된 현대사의 결과로 진주한 외국 군대가
떠난 공간에 우리 사회 어느 곳에서도 보기 힘든 ‘짬뽕문화’를 다양하게 피워내고 있는
이태원은 우리 사회와 문화의 포용성과 진취성을 시험하는 장소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태원 돌아보기

이태원관광특구는 대략 지하철 6호선의 녹사평역에서 한강진역에 이르는 약1.4km에
이르는 대로변과 그 뒷골목의 점포 밀집 지역을 일컫는다. 녹사평역에서 나와 이태원으로
향하면 관광특구를 알리는 대형 아치가 서 있다. 같은 모양의 아치가 반대편 경계
지점인 한남2동에도 하나 더 서 있다. 이태원역과 해밀턴호텔은 이태원의 중심이다.



이태원역을 나오면 해밀턴호텔 좌우로 크고 작은 상가들이 이어진다.
녹사평쪽으로는 쇼핑상가가 주를 이루고 한남동 쪽으로는 음식점과숙박시설,
유흥오락 시설이 주를 이룬다. 이태원 어느 곳이나 영어 간판이 두드러지게 눈에 많이
띈다. 그리고 우리나라 사람의 체형과는 다른 ‘큰 옷(BIG SIZE)’ 을 파는 상점들이 많다.  

 이태원마켓은 온갖 의류와 액세서리, 그리고 기념품점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다.
짧은 시간 내에 저렴한 가격으로 만들어내는 맞춤양복도 이태원에서는 가능하다.
체형을 잰 후 다섯 시간이내에 양복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이태원 소방서 옆골목, 이태원의 밤문화를 상징하는 ‘클럽’거리를 지나 보광초등학교
삼거리에서 왼쪽으로 난 언덕길을 오르면 한국이슬람 중앙 성원이 있다. 중동건설이
한창이던 1970년대 이슬람 국가들과의 우호증진을 위해 우리나라 정부가 부지를 제공하고
중동국가들이 건설비를 제공하여 완성한 우리나라 최초의 이슬람교회이다.  

서울 성원이 세워진 것은 한국전쟁중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터키군의 전도로
1955년 우리나라 최초의 무슬림이 탄생한지 21년만에 일이었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3만5000여 명의 한국인 무슬림과 10만여 명의 외국인 무슬림이 있으며 서울 성원 외에
부산, 경기도 광주, 전주 등 9곳에 성원과 선교원이 있고 40여 개의 예배소가 있다고 한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습니다. 무함마드는 그 분의 사도입니다” 라는 한글이
쓰여 있는 푸른색 타일의 정문을 들어서면 계단 위쪽에 흰 색의 교회 건물이 보인다.
중앙에 둥근 돔이 있고 좌우에 공항 관제탑처럼 생긴 두 개의 첨탑(미나렛)이 사원을
호위하듯 서있다. 미나렛은 이슬람의 성지인 사우디아라비아 하람성원의 것을 본 뜬
것이다. 이곳은 원래 신도가 올라가 예배시간을 소리쳐 외치는 곳이라고 한다.  

성원은 3층 건물로 1층에는 사무실과 회의실이 있고 2층에는 남자 예배실, 3층에는
여자 예배실이 있다. 남녀를 엄격한 구분은 이슬람의 전통이다. 성원의 정면 상단에는
초록의 아랍 글자가 붙어 있다. ‘하나님은 위대하시다’라는 뜻이라고 한다.

비신도들은 예배실 내부의 출입을 삼간다는 안내문이 있었지만 기도시간이 아니어서
한산한데다, 문이 열려 있어 내부를 잠시 들여다보았다. 바닥엔 붉은 양탄자가 깔리고
벽면엔 푸른 타일이 장식되어 있었지만 전체적으로는 수수하고 검소한 분위기였다.

나중에 알아보니 교회나 성당처럼 성상(聖像)이나 초상, 종교적 상징물로 벽면을
장식하지 않는 것도 이슬람의 한 전통이라고 한다. 이슬람교회에 가면 예언자
마호멧트 (무함마드)의 초상이나 그림을 볼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던 것은 그러니까
이슬람에 대한 나의 무지였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이슬람에 대한 무지는 우리가 학생 때 배웠던 ‘한 손엔 칼, 한 손엔 코란'
이라는 말에서 시작된다. 그 말에서 느껴지는, 이른 바 ‘믿지 않으면 죽인다’ 는 과격한
느낌은 이슬람에 대한 선입관을 ‘단순무식’ 혹은 ‘무지몽매’로 고정시켰다.
그러나 그런 말은 이슬람의 역사 어디에도 없는 출처불명의 말일 뿐이다.
'꾸란'이 아닌 '코란'도 이미 영어적 발음 아닌가. 

하나님을 유일신으로 믿는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는 그 근본 뿌리가 같은 종교이다.
모세까지만 하나님의 사도로 인정하고 예수와 마호메트를 부정하면 유대교, 예수까지만
사도로 인정하고 마호메트를 부정하면 기독교, 마호메트를 예수 이후 하나님의 사도로
인정하면 이슬람교로 대략적으로나마 정의할 수 있다고 한다.

한국이슬람교중앙회에서 발간한 소책자 『이슬람은?(WHAT IS ISLAM?)』를 읽어보니
“이슬람의 성서인 꾸란에 언급된 25명의 예언자(하나님이 인류에게 올바른 길을
알리기 위해 선택한 사람) 중에는 (우리가 기독교 성서 속에서 귀에 익은) 야곱,
롯, 다윗, 솔로몬 등이 있으며 이들 중 노아(NOAH), 아브라함(ABRAHAM),
모세(MOSES). 예수(JESUS) 그리고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MUHAMMAD)
다섯 명을 특히 중요한 예언자로 꼽는다” 고 나와 있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아프가니스탄에서 한국인 이십 여명이 탈레반에 의해 인질로
잡혀 있다. 사태가 급박하다보니 오늘날 아프간 사태의 본질은 미국을 비롯한 서방
세계의 오만과 추악한 이기심에 기인한다는 등의 이야기는 마치 한가한 음풍농월처럼
들린다. 그러나 그런 사실을 염두에 둔다고 해도 탈레반이 우리의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을 볼모로 우리와 상관없는(우리가 어찌할 수 없는) 일들을 조건으로 내세우는
것은 안타깝고 부당하다. 이슬람의 대의를 위해서도 어떤 의미로건 자신들을 사랑했던
사람들을 고통 속에 가두지 말아야한다.  

서울 이슬람성원에는 단층의 학교(PRINCE SULTAN ISLAMIC SCHOOL)가 있다.
아내와 성원을 돌아보고 내려오니 마침 수업이 끝난 어린 아이들이 건물 밖으로
뛰어나왔다. 개구쟁이 녀석들이 자꾸 통제에서 이탈하려고 하는 통에 히잡을 쓴
젊은 여선생님은 애를 태우고 있었다.
우리의 유치원이나 초등학교가 그렇듯 그들의 재잘거림이 조용하던 사원의 운동장을
순식간에 생동감으로 채워 넣고 한 떼의 비둘기처럼 깊고 푸른 하늘로 퍼져 올라갔다.
이슬람의 본질도 순종과 평화, 정의라는 다른 종교의 그것과 다르지 않다.

이슬람성원을 나와 이태원방향으로 돌아나오는 길에 “왓더북(what the book?)”이라는
간판이 있었다. 호기심에 지하로 통하는 계단을 내려가 보니 꽤 많은 책들이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는 서점이었다. 모두 중고책이라고 했다. 가격은 책의 상태에 따라 다르게
책정되어 있었다.  

직접 톱을 들고 진열대를 만들고 있는, 주인인 듯한 서양인에게 사진 좀 찍어도 되겠느냐고
물어보니 미리 물어봐줘서 고맙다고 흔쾌히 허락한다. 말하는 폼이 그렇지 않은 사람이
많았다는 뜻이겠다. 상대방에 대한 작은 배려. 세상의 평화란 거창한 일도 어쩌면
그런 작은 것에서 시작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해보며 나도 책 한권을 샀다.

다시 이태원의 거리로 나오니 배가 고파왔다. 아내와 나는 거리의 간판에 주목했다.
서울 속의 지구촌답게 온갖 나라의 온갖 음식이 이태원에 다 있는 듯 다양한 식당
간판이 아내와 나의 선택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2007년의 글)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