즐거운 이야기라면, 먹는 이야기에 비할 것이 있을까?
음식을 먹는 것은 입만 즐겁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는 일을 즐겁게 만드는 행위다.
더군다나 맛있는 음식은.
외국 생활에서 아쉬운 것 중의 하나가 한국의 음식이다.
물론 이곳 샌디에고에도 한국음식점이 여럿 있다. 두 시간 거리의 엘에이에는
한국보다 더 많은 종류의 갖가지 한국음식을 쉽게 맛볼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 어떤 경우든 '본토' 한국의 맛을 따라 갈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의 땅과 하늘, 강과 바다가 생산해내는 재료에 무수한 사람들이 만들고 지켜온 맛들...
한국에 있을 때 아내와 함께 다녀와 이곳저곳에 올렸던 식당에 관한 글들 중 일부를
"잘 먹고 잘 살자"는 제목으로 간추려 정리해본다.
5-6년 전에 가본 곳들이라 세부 정보에서 지금과는 차이가 있을 지도 모르겠다.
1. 가평 “시골마당”의 호박국수
시골마당은 호박국수로 유명해진 식당이다.
이 집의 호박국수는 국수호박으로 만든다.
국수호박은 일반적으로 우리가 알고 있는 호박과는 좀 다르게 큰 참외같은
외관을 지닌 호박이다. 이 식당에서 호박국수로 만들기 전에는 음식 재료로
쓸모가 없는 것이었다고 한다.
이 국수호박을 삶아 반으로 자르면 놀랍게도 속살이 저절로 국수 면발이 되어
밀려 나온다. 여기에 육수와 양념을 곁들이는 정도에 따라 물국수도 되고 비빔국수도 되는 것이다.
삶은 호박에서 나온 국수 면발이지만 전혀 물컹거리지 않고 무생채처럼 사각거리는 것도 신기하다.
차갑게 만든 냉육수와 함께 먹는 호박국수가 여름철의 더위를 잊게 한다.
꼭 여름철이 아니어도 청평 근처나 아침고요수목원을 다녀갈 때 들려볼만한 맛집이다.
경춘국도를 타고 청평을 지나 검문소가 있는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37번 도로를 타고
현리쪽으로 향하다보면 아랫삼거리라는 도로변에 통나무로 지은 시골마당이 보인다.
(전화번호 : 031-585-2309)
2.강화도 "우리옥"
강화 읍내의 우리옥은 유명한 식당이다. 반세기 동안 한 곳에서 백반집으로 명성을 이어온 탓이다.
강화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대부분 다 안다. 읍내 거리 시장 안 좁은 골목길에 있어 주차도 할 수 없고
식당의 안팎도 허름하지만 사람들이 북적이는 이유는 음식의 맛과 푸짐한 주인장의 인심 때문이다.
가격도 착실하다(?). 백반 1인분에 4천원, 대구찌게(소) 3천원, 병어회 9천원 등이다.
어느 것 하나 허투루 나온 밑반찬이 없지만 특히 비지찌게의 맛이 더없이 구수하다.
뼈째썰기로 나오는 이 집의 병어회를 초장에 찍어 먹는 맛도 좋다.
마니산등반 후에 출출해진 배를 달래기에 더 없이 좋은 곳이고 식사 후에는 강화성당과
철종이 왕이 되기 전에 살았던 용흥궁등의 유적지를 산책할 수 있어 더욱 좋다.
(전화번호 : 032-932-2427)
3. 여주 "구(舊) 보배네"
*위 사진 : 식당 한쪽 부엌에서 두부를 직접 만드는 모습.
여주 양평을 잇는 강변길 국도변에 있는“구”보배네집은 보리밥, 만두와 묵밥, 순두부와 두부 등으로 유명하다.
도로변에 ‘보배네집’이란 간판의 식당이 있고 “구”보배네집은 그 뒤쪽으로 난 언덕길을 올라가서 있어
처음 가는 사람은 헷갈릴 수도 있다. 보배네집과 “구”보배네집이 어떤 사이인지는 모르겠으나
아내와 내가 가는 곳은 “구”보배네이고 사람들도 그곳으로 몰리는 것으로 보아 “구”보배네가 원조인 모양이다.
토속적인 메뉴에 나오는 음식의 모양새도 식당 음식 같지 않게 수수한 편이어서 그야말로 ‘집’에서 만든 음식 같다.
식당의 모습 역시 묵은 골방처럼 지붕도 낮고 출입구도 옹색스러워 보이지만 시골 할머니집처럼
평안함과 신뢰감이 배어나온다. 휴일의 식당 앞 주차장(공터?)이 늘 비좁은 이유도 그 때문일 것이다.
모텔은 깨끗해보여도 어딘가 께름칙하고 민박집은 후져보여도 마음은 푸근하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집에 들어갈 때면 생각나는 글이다.
(다분히 매스컴 특유의 호들갑이 섞인 해프닝이었지만) 일전에 썩은 단무지가 들어간
만두속 ‘사건’이 연일 텔레비전에 보도될 때도 많은 사람들이 태연하게 이 집의
찐만두를 먹고 있었고 그 안에 아내와 나도 앉아 있었다.
신뢰감은 맛의 중요한 요소이거나 그 이전의 본질적인 문제이다.
내가 이집에서 가장 좋아하는 음식은 묵밥과 순두부이다.
여주 신륵사나 고달사지 등을 돌아볼 때 들려보기에 적당하다.
여주군 북내면 오금리에 있으며 전화번호는 031-884-4243이다.
4. 양수리 "감나무집"
북한강과 남한강이 합쳐지는 두물머리 양수리는 어디서 차를 멈추건 아름다운
강변 풍경을 볼 수 있다. 정약용의 생가가 있는 마현마을(다산마을)도 더욱 그렇다.
마을 앞으로 팔당댐에 고인 강물이 사시사철 마치 바닷물처럼 넘실 거린다.
감나무집은 그런 곳에 있다.
음식맛 이외에 식당에서 즐길 수 있는 풍경으로 우선 한점수 벌고 들어가는 식당이다.
햇볕이 좋은 계절에는 강변 가까이 식탁을 붙여 놓는데 이럴 때 식사를 하며 바라보는 강변 풍경은 더욱 한가롭다.
감나무집의 음식은 장어구이, 닭백숙, 매운탕 등이 있지만 주음식은 장어다.
노랗게 구어진 장어를 야채와 함께 싸먹는다. 양수리 두물머리나
정약용유적지, 운길산이나 수종사를 오갈 때 들리기에 적절하다.
(전화번호 : 031-576-8263)
5.여주 사찰음식 "걸구쟁이네"
영동고속도로의 여주 톨게이트 근처를 지날 때마다 길가에 보이는
“목아박물관” 이란 이정표는 늘 나를 궁금하게 했다.
목아박물관? 무슨 박물관이지?
얼마 뒤 그 안에 사찰음식을 전문으로 하는 “걸구쟁이네”라는 다소 이상한 이름의
식당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호기심은 더 커졌다. 더군다나 그 식당에서 사찰정식을
내놓는다고 했을 때 언젠가 다시 그 길을 지나면 한번 들러보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불교신자가 아닌 나로서는 사찰음식은 등산을 다니며 몇몇 절에서 무료로
제공하는 점심 공양으로 먹어본 적이 있을 뿐이었다. 절음식이라는 흔치 않은
경험에 호기심이 일었고, 대개 하산 무렵이었으므로 출출한 배를 채울 수 있었기에
절에서 얻어먹는 음식 맛은 매번 좋았던 걸로 기억에 남아 있다.
그런데 그 음식을 상품화해서 판다는 데는 솔직히 좀 고개가 갸우뚱거려졌다.
안동에서는 헛제사밥이라 하여 제사음식을 팔기도 하지만 푸성귀를 주로 하여
내놓을 수 밖에 없는 절간음식을 상용화하여 판매한다는 것은 그리 현명한 생각이
아닌 듯 보였다. 채식위주의 식단이니 몸에는 좋겠지만...
나는 좋은 약은 입에 쓰다는 말에는 긍정하지만 입에 쓴 음식을 몸에 좋으니 먹어야
한다는 논리에는 반대하는 사람이다. 음식은 철저히 맛이 우선이라고 생각한다.
기대치보다는 호기심에 이끌려 찾아간 걸구쟁이네의 음식은, 그러나 상상 이상이었다.
그곳은 단순히 호기심을 상품화한 식당이 아니라 맛으로 차별화된 음식을 내놓는 곳이었다.
사찰음식은 알려져 있다시피 육해공의 고기를 쓰지 않는다. 그리고 파, 마늘, 달래, 부추, 흥거 등 오신채를 쓰지 않는다.
한국 음식에 그런 것들을 빼고 나면 먹을 것이 무엇 있겠느냐는 생각은 착각이었다.
들기름과 이 식당만의 천연조미료로 무쳐낸 취나물, 곤드레, 도라지 등의 나물과
산초두부, 장떡, 장아찌는 산뜻하게 입안을 자극했다. 육식보다는 개운하고 정갈한
맛을 제일로 치는 아내는 특히 좋아했다. 걸구쟁이는 마을 이름이라고 한다.
인공조미료를 넣지 않은 자연 본래의 맛을 느끼고 싶을 때 찾아가면 좋을 곳이다.
목아박물관의 목아(木芽)는 박물관장인 박찬수씨의 호라고 한다.
박물관 내에는 불교목공예품과 기타 불교미술품이 전시되어 있다.
식사 후 공원 같은 야외전시관을 둘러볼 수 있으며 실내 전시관 관람은 별도의 비용을 지불해야 한다.
특별히 불교 미술품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면 야외전시관을 산책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나들이 기분을 낼 수 있다.
(전화번호 : 031-885-9875)
6.파주 "욕쟁이할머니집"
우리 정서에 욕은 때로 따뜻한 정감이나 가까운 친밀감을 드러내는 역설적인 표현이
되기도 한다. 그러니까 경상도에서 자주 쓰는 ‘문딩이자슥’이나 전라도의 ‘염병허네’
같은 말은 의학적으로는 무서운 질환을 나타내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쓰이기에
따라 하는 쪽이나 받는 쪽이나 대개 독언(毒言)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나라의 식당 중에 ‘욕쟁이할머니집’이라는 상호를 가진 곳이 몇 군데 있다.
욕쟁이아줌마나 욕쟁이아저씨집이라는 상호는 들어보질 못했으니 그런 식당에서는
아마 연세가 많으신 할머니들이 나어린 손님들을 대할 때 마치 손자처럼 여겨
정감어린 욕 몇 마디를 곁들이는데 기인한 것 같다. 그런 정서적이 교감이 없고서야
요즈음 세상에 누가 제 돈 내고 음식 사먹으면서 욕까지 얻어먹으러 가겠는가.
욕쟁이할머니집이란 상호 자체가 할머니의 푸짐한 인정과 맛깔스런 손맛을 나타내는 역설적인 표현이리라.
광릉수목원 부근의 경기도 포천군 고모리에 있는 욕쟁이할머니집(031-54249390)도
그렇다. “욕쟁이할머니집”이라는 멋진 필체의 현판을 지나 흙벽의 기와집으로
들어서면 먼저 마루에 앉아 식당일을 지휘하는 풍채 좋은 할머니의 환영 인사를
받게 된다. 방으로 들어서는 입구 한 쪽 툇마루에는 상추와 배추 그리고 풋고추와
쌈장이 놓여 있다. 그 위의 벽에 쓰인“양껏 갖다 드세요 ” 라는 글귀가 할머니의 인심을 대변한다.
이 집의 식사 메뉴는 우거지정식이지만 그 전에 이 식당에서 가마솥과 장작불로
직접 만든다는 손두부를 먹어 보아야 한다. 흰 두부와 검은 두부가 섞여 나오는데
곁들여 나오는 김치조림에 싸먹는 맛이 그만이다. 다른 곳에서는 김치와 돼지고기를
볶아서 내놓지만 이곳에서는 그냥 김치를 멸치에 조려 내놓는데도 맛이 그만이다.
된장에 지져낸 우거지와 청국장, 그리고 갈치조림등을 을 비롯한 열댓 가지의
반찬과 함께 나오는 우거지정식도 만족스럽다. 특히 청국장은 걸쭉하고 구수하여
특유의 냄새 때문에 청국장을 기피하는 사람에게도 무리가 없다.
오십 년 전 충청도에서 식구들과 함께 이곳으로 옮겨와 온갖 장사를 다한 끝에
이십 년 전에 “참깨 세 냥쟁이”를 팔아 식당을 개업했다는 정의만 할머니(81세)의
말에는 각고의 세월을 이겨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자부심과 여유로움이 서려 있었다.
지금은 아들인 홍승표 사장이 전체적인 식당 운영을 하고 있지만 식당 곳곳에
여전히 할머니의 눈길과 손길이 머무는 듯 했다. 홍승표사장은 이름난 서예가라는
할머니의 은근한 자식 자랑이 곁들여졌다. 식당 곳곳에 붙은 예사스럽지 않은 붓글씨가 이해가 갔다.
왜 욕쟁이할머니냐고 짓궂게 물었더니 “이제는 욕 안한다”며 할머니는소녀처럼 부끄럽게 웃으셨다.
7. 남양주 "서울칼국수"
어릴 적 어머니는 가끔씩 점심으로 칼국수를 손수 만들어 내시곤 하셨다.
밀가루 반죽을 다듬이 방망이로 얇게 밀어 채를 썬 다음 멸치나 조개 등속을우려낸
맛국물에 끓여내기도 하고 드물게는 사골을 고아낸 육수를 사용하기도 했다.
똑같은 밀가루와 국물을 사용하였음에도 손으로 뚝뚝 떼어 넣는 수제비보다
칼국수를 나는 더 좋아했다. 이런 나의 버릇을 두고 아내는 “꼭 손 많이 가는
음식만 좋아한다” 고 꼬집기도 한다.
엄밀하게 말하면 나는 칼국수보다 칼국수 국물에 말아먹는 밥을 더 좋아한다.
떡국국물에 밥, 라면 국물에 밥을 좋아 하듯이.
경기도 남양주시( 031-594-1399)에 있는 서울칼국수집에서 그런 옛 맛을 느껴볼
수 있다. 사골로 끓여낸 국물의 맛이 은근하고 구수하기 그지없다. 비좁은 옛 도로로
찾아가기가 성가시지만 일단 들어서면 후회하지 않는다. 메뉴는 칼국수와 직접 빚어낸다는 만두뿐이다.
아내가 단출한 메뉴를 가지고 있는 식당을 좋아하는 이유를 알게 해준다.
8 가평군 "들풀"
웰빙이란 말이 떠돌기 시작한게 언제부터인지 모르겠다.
본시 사람의 모든 먹거리가 ‘웰빙’이 아니었나? 새삼스럽게 수선피울 것 없이
나라마다 자신의 전통음식이 가장 강력한 ‘웰빙’일 것이다.
가평에 있는 들풀은 그렇게 웰빙에 앞선 전통음식을 내놓는 식당이다.
식당으로 들어서는 길에 있는 수십 개의 장독이 눈길을 잡는다.
된장과 청국장을 담고 있는 것이라 한다.
벽에 걸린 작은 메주덩어리들이 장식품으로도 손색이 없을 만큼 귀엽다.
정식을 시키면 순서대로 나오는 음식이 모두 정갈하면서도 세련되었다.
몸에 좋아도 냄새가 역해 외국생활에서 금지식품이 될 만한 청국장도
매실청과 검정콩가루를 넣고 그 위에 오디를 얹어 냄새도 없애고
보기에도 상큼하기 그지없게 내놓는다.
음식에 있어서 ‘전통의 재창조’ 혹은 ‘창조적 전통’란 호칭을 이름 앞에 붙여주고 싶은 식당.
(전화번호:031-585-43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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