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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매향리, 공습이 그치다.

by 장돌뱅이. 2005. 8. 13.


       내 조국은 식민지      
       일찍이 이방인이 지배하던 땅에 태어나
       지금은 옛 전우가 다스리는 나라
       나는 주인이 아니다
       어쩌다 아비가 물려준 남루와
       목숨뿐
       나의 잠은 불편하다
                                -정희성의 시, '불망기' 중에서-

몇해전 아내와 매향리에 간 적이 있다.
초겨울의 음산한 날씨속에
소름 돋는 소리를 내며 미군폭격기들이
작은 해안 마을 매향리의 상공을 날고 있었다.

공습은 이라크 바그다드에나 있는 것인 줄 알았는데
우리의 국토 작은 농섬은 무려 반세기동안
미군의 공습을 받고 있었던 것이다.
매향리에서 그것은 훈련이 아니라 분명 공습이었다.


* 미군의 폭격으로 형편없이 쪼그라든 우리의 국토 농섬.

수십 년동안 폭탄에 짓뭉개진 섬은 크기마저 원래의 3분의 1로 줄어들었다고 한다.
국토의 모습은 그 속에서 살고 있는 사람들의 삶을 반영하는 거울이 된다.
시달리고 부서진 것이 어디 섬뿐이겠는가.
고기잡이하던 어부가 기총사격을 당하고
조개를 채취하던 어린 소녀가 폭탄의 파편에 다리를 잘리고
굴을 따던 만삭의 임산부가 포탄에 명중되어 즉사 당하는 참상이
미군의 폭격훈련이 시작된 이래 지난 5십년 동안 매향리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 뿐만이 아니다.
폭탄의 폭발음과 저공비행의 소음으로 동물은 새*끼 를 낳지 못하고
주민들은 난청을 앓거나 유산을 하고 정신병을 앓는 고통을 받았다.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도 생겨났다.
170가구 남짓의 작은 마을에 30명 이상이 자살을 했다는
마을 지도자의 법정 증언은 우리를 전율케 했다.

경기도 화성의 서해 바닷가 매향리는 행정적으로만 대한민국 땅일뿐
실질적으로는 미국의 땅이며 가상으로는 북한 땅이라는 어느 분의 말은 그대로
매향리의 상황을 정확하게 압축하여 설명한다.


*매향리 입구에 새워진 장승.

이제 그 끔찍한 폭격이 그쳤다고 한다.
폭탄의 소음과 연기 대신에 마을 이름처럼 매화 향기가 퍼지라 빌어본다.
그리고 이 땅에, 이 지구상에 다시는 또 다른 매향리가 생겨나지 않기를 빌어본다.
무력을 앞세운 미국의 세계 지배 논리가 별로 변한 것이 없어 보이는 터에
그것이 가능한 상상인지는 모르겠지만.


* 매향리에는 민중미술작가 임옥상이 세운 철제조형물 ( ‘자유의 신 IN KOREA')이
녹슨 모습으로 서있다. 소재로 사용된 철재류는 모두 매향리 폭격장에서 수집한
폭탄과 탄피들이다. 미국이 말하는 ‘자유의 신’이 매향리에선 얼마나 흉칙한 모습으로
변해 있는지, 주민들은 얼마나 큰 고통을 받고 있는지를 형상화한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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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02년 아내와 나는 ‘철기시대 이후를 생각한다’라는 주제로 열린 임옥상의
개인전을 가보았다. 거기에는 마찬가지로 매향리 폭격장에서 수집한 포탄과 총알로
제작한 여러 조형물들이 전시되어 있었다.

작가가 의미하는 철기시대란 인류문명의 원동력으로서의 철이 본래의 의미를 상실한 채
무력과 살생의 상징으로 변질된 야만의 시대를 말한다. 그래서 작가는 “매향리 미군
사격장에 널려진 포탄의 잔해들은 파괴와 혼돈으로 점철된 인류문명사의 응축”이라고 규정했다.
폭력적인 힘이 상징하는 세상은 꼬부라진 포탄을 남성의 성기에 빗댄 작품
“THE GREAT AMERICAN PHALLUS"에 통렬하게 풍자되어 있었다.


*위 사진 : 작품  “THE GREAT AMERICAN PHALLUS"

작가는 그런 풍자에 멈추지 않고 전쟁과 압박과 고통의 철기시대를 극복한 뒤에
다가올 평화와 자유와 해방과 안식의 시대를 꿈꾸며 포탄에 은빛 숟가락을 이어
희망의 날개를 달아 주었다. 숟가락은 우리에게 생명을 불어넣는 도구 아니던가.
모든 것이 제 자리를 찾아 사랑과 생명이 충만하게 되는 세상을 위하여
작가는 “군함을 녹여 논밭을 가는 보습을 만들고 분단의 철책을 녹여 자유의 기념비를
만들자“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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