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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과 사진/한국

인사동 카페 "귀천"

by 장돌뱅이. 2012. 4. 8.

*위 사진 : 인사동에 있는 카페 "귀천"에서 목여사와 아내

천상병은 중학교 시절에 문단에 이름을 올린 천재 시인이었다.
1967년 이른바 '동백림 사건' 때, 이와 관련된 친구로부터 몇 백 원씩의 술값을 빌린 적이 있다는 이유로 함께 '간첩'으로 몰리게 되었다. 모진 고문을 받은 천상병은 아이를 낳을 수 없을 정도로 불구가 되었다. 이때 친구 여동생 목순옥이 수년간 간병을 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었고,  친구의 도움으로 인사동에 카페 "귀천"을 열었다.  

지난 67년, 동백림 사건에 연루되어 억울하게 중앙정보부에 끌려갔던 남편은 6개월 만에야 집행유예로 풀려나왔다. 대학 친구의 수첩에 적혀 있던 자신의 이름 석자가 ‘간첩’ 천상병으로부터 모든 것을 앗아간 유일한 죄목이었다. 피골이 상접한 육신과 황폐한 정신 그것은 시인에게 내려진 가장 잔인하고, 혹독한 사형선고였다. 서울대 상대를 졸업한 수재이자 촉망받는 시인으로, 시대와 타협하지 않는 평론가로, 실력 있는 번역가로 기대를 모았던 시인 천상병의 화려했던 날들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출소 후, 고문의 후유증과 울분을 잊기 위해 남편은 거의 매일을 술에 절어 지냈다. 최소한의 영양 섭취마저 거부당한 그의 육체는 나날이 쇠잔해졌고, 71년 7월 어느 날, 거리에서 쓰러진 그는 무연고자로 몰려 서울시립정신병원에 강제 입원당했다. 출판 사상 유래가 없는, 살아있는 시인의 유고 시집 『새』가 출간된 것도 이 무렵의 일이다. 의사는 그에게 ‘신경황폐증’이란 진단을 내렸다. 그의 머릿속에 난마처럼 얽혀있는 어지러운 상념들, 고통의 기억들이 결국 손을 쓸 수 없는 불치의 병이 되어 버렸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도 25년 여 동안, 세상을 떠나는 그날까지도 남편은 세상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는 '천상 시인'이었다. 모든 것을 버린 후에야 , 그토롤 추악한 세상의 그늘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워질 수 있었던 것일까. 가끔 내가 그렇게 쉬운 말로 시를 쓰면 어떡하느냐고 물어보면 "괜찮다. 내시는 생활시인데 뭐"라고 대답하던 남편, 어린아이처럼 순박하기만 하던, 기분이 좋을 때면 나를 "아내야"라고 살갑게 불러주던 내 남편, 시인 천상병. 그가 떠난 28일 오전 11시 20분. 그날부터 내 생의 시곗바늘도 멈춰버렸다. 조금은 불운했고, 그보다 훨씬 많이 행복했던 내 남편 천상병을, 나는 영원히 잊지 못한다.

-『월간 COFFEE』중에서 -.

시인이 겪어야 했던 모진 시간을, 터무니없는 허위와 광적인 폭력의 권력과 시대를 결코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속에서 피어난 천시인과 목순옥여사의 사랑을 보며 위안을 받기도 한다.
두 사람 모두를 ‘세상에 소풍 나온’ 천사라 불러 부족하지 않아 보인다.

(2004.7 쓴 글)

*천상병 시인은 1993년에, 목순옥여사는 2010년 각각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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