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과 함께 살아온 시간이 33년을 지나고 있습니다.
더불어 우리의 나이도 어느새 이순(耳順)을 넘어서고 있습니다.
이순(耳順)은 흔히 생각과 행동의 안팎이 모두 부드러워지는 나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모나고 편협한 생각과 행동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망(迷妄)의 저에게는
치열한 수련을 거친 청정한 수도자의 세계처럼 도달할 수 없는 먼 이야기입니다.
또 어떤이는 살아온 날들을 지워야 하는 나이라고도 합니다.
지워 버려야만 앞으로의 삶이 풍요로워지는 그런 일이
당신과 제가 함께 한 세월 속에 있었을까 잠시 옛날을 더듬어 봅니다.
돌이켜보니 아직 정리되지 않은 채로 그 자리에 남아있는 것들이 더러 있긴 하네요.
그러나 그것들은 우리가 가꾼 33년의 시간 밖에서 온 하찮은 것들일 뿐입니다.
단 한번도 우리의 삶을 흔들거나 지배하지 못했던 것으로 저는 기억합니다.
지난 33년.
미망(迷妄)의 제게 남아 있는 것은 온통 미망(未忘)의 기억들 뿐입니다.
일테면 이런 것들 말입니다.
강원도 오지에서의 당신과 함께 한 농활과 흰 눈이 내리던 어느 초등학교에서의 모임.
(당신은 아직 저의 흑심을 눈치채지 못했던 시간이라 더욱 애틋했던 시절)
우리가 만나던 무교동이나 학교 앞 다방과 매번 신청하던 같은 노래들.
봉황대기 고교 야구를 보던 무덥던 8월의 서울운동장.
당신이 입던 자주색 줄무늬의 원피스 - 언젠가 제가 지나가는 말처럼 그 옷이
'특별히' 마음에 든다고 하자 군 입대 하던 날 당신이 '특별히' 입고 나와주었지요.
저는 짐짓 그 '특별함'을 눈치채었으면서도 빡빡 깍아 생경한 머리를 문지르며
"남들은 입대 할 때 애인이 운다는데 왜 곱단씨는 울지도 않아? 울어. 울어봐."
하며 썰렁한 농담만 해대었고.
그리고 제가 펴낸 책 『아내와 함께 하는 국토여행』 속에서도 적었던 기억들.
이제 와 다시 읽어보면 고치고 싶은 곳이 너무 많은 부끄러운 글입니다만
당신과 나눈 기억에 대한 기록만은 서툰 그대로 남겨두고 싶습니다.
"쑥빛 제복의 '군바리' 시절, 내 기억 속의 아내는 늘 아카시아 향기가 가득한
오월의 언덕을 넘어 면회를 왔다. 전방 부대의 황량했던 풍경마저 그 기억 속에서는
늘 향기로움으로 가득차곤 한다. 복덕방과 시장 골목을 뒤지면 함께 장만했던 허름한
단칸 셋방의 신혼에도 아내는 늘 출근길의 내 어깨에 당당하고도 따뜻한 시선을 실어 주었다.
작고 가난한 아내와 나의 밥상이 초라하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일 것이다."
불혹도 지천명도 이순도 상관없이 저는 그냥 당신을 만나기 위해 햇살 맑은
무교동의 거리를 신나게 달려가던 젊은 날의 응석둥이고 철부지이고자 합니다.
오늘 저녁엔 우리가 좋아하는 태국 방콕의 야경을 보며
우리의 지난 33년을, 우리만의 33년을 자축해 봅시다.
고맙습니다.
'여행과 사진 > 태국' 카테고리의 다른 글
2017.10. 방콕3- SKHUMVIT(스쿰윗) (0) | 2017.11.08 |
---|---|
2017.10. 방콕2 - THONGLOR(통로) (0) | 2017.11.07 |
SAY "NO!" (0) | 2017.10.18 |
쏘이 랑수안 2007 (0) | 2017.10.17 |
기도하는 사람들 (0) | 2017.10.16 |
댓글